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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ul 01. 2019

지워진 자들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다큐 <지워진 자들의 흔적>의 저항법 


출처:https://www.tiff.net/tiff/erased-ascent-of-the-invisible)


1. 흑백 사진에는 공터의 배경만 존재할 뿐, 인물도 사건도 없습니다. 관객은 감독과 사진작가 간의 대화를 통해 이 사진은 정부군의 실제 납치 장면을 찍었던 것임을 알게 됩니다. 감독은 사진 원본을 편집하여 인물이 사라지게 만든 것이지요. 그제서야 공중에 놓인 군인 모자와 바닥에 납작하게 붙은 신발이 보입니다. 지워진 인물들의 형상도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감독은 말합니다. 지금 ‘전쟁’에 대한 논의가 이 사진과 닮아 있다고. 사건의 중요한 구성요소들은 부재한 채 이루어지는 공허한 담론. 그 안에서 희생당한 구체적 개인들은 지워져 있습니다. 


2. 감독은 실종자의 사진들을 모아 놓은 격자식의 포스터에서 한 사람의 사진을 오려냅니다. 특정인의 사진만 보여주었을 때 아무도 몰라보던 이를, 포스터로 보여주자 모두가 알아보았다는 일화를 들려줍니다. 개개인의 희생자는 다른 희생자과의 병치된 배열 안에서 의미를 획득합니다. ‘희생자’라는 보통명사 안에서 묶일 때 그들은 희생자로 인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희생자 사진의 배열은 어느 순간 상징이 되고 아이콘이 되어버립니다. 감독은 바로 그 순간을 이들이 두번째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합니다. 


3. 감독은 담벼락에 오랫동안 덧씌워진 벽보들을 뜯어냅니다. 풀칠과 눈과 비, 세월에 의해 몇 겹인지도 모를 지층들이 생겼고, 감독은 끈질기게 시간의 지층을 뚫어냅니다. 별안간 그 틈새로 희미하게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래전 붙여졌던 희생자들의 사진입니다. 감독은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윤곽선을 덧대고 이름과 실종 시간과 장소를 기재합니다. 하지만 감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묻혀진 그들의 복원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출처: https://www.filmfesthamburg.de/en/programm/Film/30851/Tirss_Rihlat_al_Sououd_ila_al_Mari


4. 감독은 사진을 통해 희생자를 스케치합니다. 그는 상징이 되어버린 ‘희생자’ 집단에서 구체적인 개개인을 불러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상의 차림과 일상의 표정, 그리고 일상의 배경을 선사합니다. 감독은 고민합니다. 그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그들을 호명해내는 방식을. 감독은 개개인을 ‘희생자’의 일원으로 다가가는 대신 그들을 일상의 가장 생생한 순간들로 불러냅니다. 희생자를 친숙하고 가까운 존재로 살려내면서 그들과 우리 사이에 놓인 거대한 간극을 줄이려는 시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혹은 그들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선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5. 레바논 정부는 만 칠천명이라는 희생자 수를 부풀려진 허수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발견된 유해들과 일치하는 이천여명이라는 숫자가 정확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부 주도에 의한 일반 시민 유해 발굴은 한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무고한 희생자들이 묻혀 있으리라 추측되던 노르망디 쓰레기 처리장은 정부의 입찰 사업으로 현대식 해안 도로로 정비되었으며, 쓰레기와 유해들-그 어딘가에 존재하리라 믿어졌던-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정부는 10년 이상 실종된 이들은 사망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으니, 유족에게 지방법원으로 가 사망신고절차를 밟으라고 종용합니다. 희생자에 대한 국가의 처우는 대대적인 기념비 사업으로 대체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희생자는 ‘순교자’로 기려졌습니다. ‘순교’는 개인들의 자발적 결단을 칭송할 뿐, 가해와 책임의 문제는 사라집니다. 


6. 감독은 완전 범죄는 두 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일단계는 살인행위. 이단계는 범죄의 은폐입니다. 


7. 지워진 자들의 흔적을 우리는 과연 포착할 수 있을까요. 만약 누군가의 예리한 시선에, 혹은 끈질긴 시도 끝에 그 흔적을 얻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우리는 그 흔적을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요. 그 흔적으로부터 지금, 어떤 것을 살려내야 할까요. 가산 할와리 감독의 <지워진 자들의 흔적>은 사라져가는 희생자들에 대한 윤리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다큐 <지워진 자들의 흔적>은 2019년 '20회 전주 영화제'와 '아랍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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