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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Mar 31. 2017

3월-아직 완성되지 못한 애도(1)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에 대해

삶이 관계를 대하는 방식은 불공평합니다. 대부분의 만남은 우연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만날 가능성은 만나지 않았을 가능성보다 결코 높지 않았을 텐데, 반반의 확률이 촘촘하게 짜여져 어느 날 어딘가에서 우리는 만나고 맙니다. 그것은 개인의 소망, 의지, 예측을 너머선 것이라 우리는 그 시작점에 운명이라는 낭만적인 딱지를 붙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관계의 끝은 시작과는 조금 다릅니다. 끝남이 우리의 의지로 인해 벌어졌든 또 하나의 운명처럼 닥쳤든 간에, 그 마무리는 언제나 관계 주체의 몫으로 남겨집니다. 만족해하거나 분해할 수도 있고, 슬픔 속에 오래 허우적거리거나 금새 극복하기도 하죠. 이를 삶이 무심하게 대신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떠나고, 보내고, 남겨지는 건 참 어렵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을 연습한다거나 준비한다고 말하는 건 조금 이상하지요. 그러나 누군가를 떠나 보내는 일을 훈련하고 대비한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책임’과 ‘의무’, ‘역할’ 이란 것을 작별 안에서는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수많은 종류의 작별 중에 죽음과 연계된 나의 경험은 많지 않습니다. 대학교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려서 함께 살았고 커서도 시간을 가장 많이 함께보낸, 내게는 애틋한 존재였지요. 하지만 나는 그가 천천히 늙어가는 시간을 함께 해왔고 종국에는 살아있음이 그를 괴롭힌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 그가 병원에 입원을 하고, 산소 호흡기를 물고, 맥박이 낮아지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때에도 나는 몹시 울었지만, 분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이별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나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납득할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러나 이모의 죽음은 달랐습니다. 나는 그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순리가 아니라 불합리한 대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고 납득되지 않았으며, 부정하고 분노했습니다. 암이 발병했던 원인과 그 암을 말기가 되어서야 발견했던 필연적인 이유들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모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데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모가 죽고 나서도 한참을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엉망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이모를 제대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비로소 애도할 수 있게 된 것 입니다. 


사전에서 애도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행위로 단순하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더 깊게는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 후에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는 정신 과정을 의미합니다. 즉, 상실의 상황을 수용하고 적응하여, 일상으로 무리 없이 복귀하는 것 까지를 포함합니다. 남아있는 사람이 삶을 지속하기 위해 애도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고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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