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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Dec 14. 2019

나만의 겨울 영화 리스트

겨울의 감각과 감성을 자극하는 <이터널선샤인>, <렛미인>, <캐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계절마다 보고싶어지는 영화들이 있다. 나는 각 계절의 특징을 고유한 감성과 연결짓고 있는데, 그런 감성과 나란히 놓인 영화들이다. 그래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목록. 겨울은 서늘한 풍경과 그 한기와 대비되는 뭉클한 온도를 동시에 가진 영화가 떠오른다. 추위를 못 견뎌하는 내게, 겨울은 유난히 신체적 감각으로 각인되어 있다. 찬바람에 코 끝이 찡- 해질 때. 숨을 내쉴때 하얀 입김이 눈앞에 화악 퍼지는 모습. 뽀드득 뽀드득, 갓 쌓인 눈 위를 걸을 때의 느낌이나 꽁꽁 언 빙판 위를 걸을 때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뒤축에 힘을 싣는 몸의 중심, 조그만 손난로를 쥐고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 아찔해지는. 누군가가 빨개진 양 귀나 떨고 있는 손등에 손을 얹어줄 때 천천히 퍼지는 체온의 따뜻함. 따뜻한 실내로 뛰어 들어간 순간 잔뜩 움츠리고 있던 몸이 파아- 녹듯 풀어지는 나른함까지. 추위란 아주 낮은 온기에도 고마워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어, 나는 겨울만큼은 언제나 사랑 중이었던 것 같기도 하구. 

그래서 이런 겨울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영화들이 보고 싶어진다. 올해에는 유독 일찍 찾아온 한파에 더 보고 싶었다. 김 서린 침실 창문에 커텐을 치고 따뜻한 차 한잔을 우린 뒤, 포근한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1.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오랫동안, 그리고 여전히 내 겨울 무비 1순위에 있는 영화 이터널선샤인. 워낙 유명해서 영화의 매력에 대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아름다운 포스터로도 알 수 있듯이,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처음 만나 사랑하는 계절이 겨울이다. 그들이 처음 만난 해변은 강풍이 불고 클레멘타인은 너무 추운 나머지 빈집 창문을 깨고 무단점거를 하기까지 만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첫 데이트. 꽁꽁 언 호수 수면을 미끄러지며 걷다 나란히 드러누웠을 때. 얼마나 추운지 코끝과 볼이 벌겋게 얼어있으면서도, 하얀 입김은 쏟아지는 별빛을 가리지 못하고 이들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 둘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겨울을 통과하고, 기억이 지워지지 않도록 지켜야하는 장면 장면들은 모두 겨울에 놓여있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마다, (특히 털모자를 푹 눌러쓰고 파카깃을 올릴 대로 올리며 추위에 떠는 그들을 보면서) ‘아우 추워’ 하며 괜히 몸서리 치면서도 겨울이 사랑에 없어선 안되는 계절이라고 믿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손 잡고 얼어버린 호수나 강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보고 싶다는 낭만 하나도 이 영화때문에 품어 오고 있다. 응. 아직까진 품고만 있다구. 















2.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2008)



 2010년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됐지만, 난 원작인 2008년 스웨덴 영화를 더 좋아한다. 사실 렛미인은 자주 보기 힘든 영화다. 볼 때마다 무섭고 괴롭다. 왜 많이 보아도 잔인함에 무뎌지지 않는 걸까.  특히나 뱀파이어 소녀의 고독이나 굶주림은 가늠이 되지 않아 낭자하는 피를 봐야하는 것 자체가 괴롭다. 하지만 몇몇 장면들을 제외하고 영화 전반은 고요하고 정적이고 건조하다. 겨울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겨울이란 계절의 특성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 녹아 있다. 그래서 어김없이 겨울이면 생각난다. 사실 자신이 없어서 대부분 전반부만 돌려보곤 하지만. 뱀파이어 소녀와 외로운 소년 오스칼이 처음 만나는 건 눈쌓인 아파트 운동장이다. 맨발에 얇은 옷을 걸치고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소녀 위로 눈송이가 떨어지고 그녀의 악취는 추위 속에서도 소년에게 전해진다. 이상하게 난 그 비현실적이고 오묘한 장면이 가슴 아프게 예뻤다. 북유럽답게 눈이 수북히 쌓인 풍경들은 시리게 하얗다. 순결하고 정갈하다. 그래서 그 위로 뿌려지는 새빨간 피의 잔인함이 배가 된다. 단순한 선과 악의 윤리를 적용할 수 없어 영화의 한기는 너무나 서늘하고 외롭다. 















3. 캐롤 (Carol, 2015)



 가장 최근(그래도 어언 2016년) 내 겨울 영화 목록에 추가된 아름다운 영화. 겨울이 배경일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를 담고 있어 더 낭만적이다. 산타클로스 모자를 쓴 테레즈와 딸 선물을 고르는 캐롤의 첫 만남. 보고 있는 나마저 숨을 멎게하는 시선의 강렬한 마주침. 영화는 시종일관 그렇다. 대사들이 적은 건 아니지만 캐롤은, 테레즈는, 눈빛으로 언어화하지 못하는 감정들을 더 많이 나눈다. 특히 캐롤의 중저음 목소리와 깊고 그윽한 눈빛은 고혹스럽다는 표현만으론 부족하다. 그 안에는 얼마만큼의 괴로움과 불안과 분노와 욕망이 응축되어 있을까. 이 영화는 겨울의 바깥 풍경보다 따뜻한 실내 장면이 더 많다. 그건 아마도 공개적일 수 없는 이들의 사랑 때문일텐데, 그래서 시린 바람을 피해 둘만의 공간에 머물때 내게까지 전해지는 그 포근함과 아늑함이 아련하구. 그들이 함께인 따뜻한 실내의 창에는 김이 서려 밖은 부옇게 보인다. 나는 그게 마치 세상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서로에게 눈이 먼 (멀어야 하는) 그들의 처지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테레즈의 친구 데니(거의 단역)가 그런 말을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게 알기 어렵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그에게 끌렸는지 아닌지라고. 테레즈는 그가 든 핀볼의 비유를, 실제 관계들의 복잡성을 단순화시켰다고 반박하지만. 나는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이 정확히 사랑이 시작된 이유나 배경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런 불가해함을 넘어서는 강한 끌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를 만났을 때, 나는 이들처럼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시선을 피하지 않을 용기가 있을까.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엔딩 후 내가 정말 좋아하는 OST가 흐를 때 나도 김 서린 창문 너머를 괜히 바라보게 된다. 



  





영화만큼 OST도 정말 좋아요. 감성에 젖고 싶은 밤엔 이 플레이리스트를.

https://youtu.be/dpYikug2J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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