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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ul 20. 2020

한국전쟁 서사를 가족의 관점에서 다시 보기

인류학자 권헌익의 <전쟁과 가족> 

 한 사건의 체험자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을 때, 당사자가 아닌 남겨진 이들은 그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지난 오늘날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여기에는 누가 기억할 것이냐는 ‘기억의 주체’와 더불어 무엇을 기억할 것이냐는 ‘기억의 내용’도 중요합니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일은 그 외의 것들을 기억의 대상에서 탈락시키고 잊음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전쟁은 오늘의 일상과는 단절된 예외적 시공간입니다. 현실과의 큰 괴리는 후세대가 이 서사를 공감과 이해가 결여된 추상적인 언어나 이미지로 기억하는 위험을 초래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자주독립의 염원과 탈식민의 시도, 미군정과 국제적 냉전의 문제가 중첩된 결과입니다. 또한 이로 인한 분단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면에서 완전히 종결됐다고 볼 수 없죠. 자본과 경제로 세계질서가 재편되는 듯하면서도 식민과 냉전의 유산이 여전히 존재하고, 세계 곳곳에서 내전이 지속되고 있는 요즘. 한국전쟁과 그 기억을 다시 돌아보는 일은 분명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냉전시대의 베트남 전쟁 미시사를 연구해온 인류학자 권헌익은 <전쟁과 가족>을 통해 한국전쟁을 가족이라는 친족의 공동체를 통해 다시 봅니다. 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은 한반도라는 영토 위에서 남한과 북한의 이념 대립이 전투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전쟁과는 다르게 한국전쟁은 군대의 ‘선제적 폭력’과 ‘징벌적 폭력’이 남발되며 민간인 학살의 피해가 컸습니다. 당시 정치적 신념은 도덕성과 민족성의 척도가 되었고, 적의 이념을 신봉하거나 적을 지원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은 모두 잠재적인 반역자로 여겨져 처벌당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반역자의 가족과 친족 또한 연좌제로 고통받아 왔음은 물론이고요. 한국전쟁이 가족과 친족, 마을과 같은 사적 공동체를 파괴하고 그들의 비극을 양산해온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쟁의 주체는 정치적 이념을 가진(적어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근대적 개인이면서 혈연이나 학연, 지연 등의 집단에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적 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저자는 인류학과 사회학의 개념들을 소개합니다. 루이스 모건의 ‘소시에타스’와 ‘시비타스’의 구분-사람, 사람들의 관계에 기초하는 통치체계와 제도화된 영토와 재산에 기초하는 근대정치 체계는 개인에게 놓인 이중적 구속을 이해하는 기반이 됩니다. 또한 부르디외의 ‘행위로서의 친족’ 개념은 자연적이고 전통적인 규범을 의미하는 기존 친족 개념을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실천을 통해 친밀함과 인접성의 유대가 생산된다는 관점은 친족을 유동적이고 구성적인 경계로 이해하게 하죠. 이 지점에서 저자는  ‘우호(amity)’에 주목합니다. 친족관계의 상호성뿐 만 아니라 개인이나 무리 간의 친밀감이라는 두 가지 어원적 의미를 지니는 이 개념은 분리된 두 항-정치와 친족, 근대적 개인과 사적 공동체를 이어줄 수 있는 키가 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개념들로 한국전쟁을 국가와 이념이라는 거대서사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기존에 이루어진 국내외 인류학 연구들(윤택림, 박찬승, 권귀숙, 김귀욱 등)을 소개하고, 안동과 제주의 마을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단위에서 전쟁을 바라봅니다. 또한 국내의 전쟁 문학과 영화들을 아우르며 시대별로 전쟁에 대한 관점과 그 재현이 변모하는 양상을 통찰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한국의 탈식민 국가건설 과정의 정치공동체가 ‘개인들의 집합체라기보다는 이념화된 가족의 확장체’라고 분석합니다. 관계라는 미명 하에 파괴되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거죠. 공적이고 정치적인 주체와 사적이고 인간적인 주체는 애매한 경계에 놓여있으면서도 공존할 수 없는 배타적인 특성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저자는 제주 4∙3이 과거사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구축해낸 평화를 이 두 항이 화해하는 장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례와 상생굿이 함께 이루어지고, 망자에 대한 기림과 산자의 삶을 동시에 추구하는 노력은 역사의 기억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안겨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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