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여름의 로맨스가 궁금해진 날
역대 최장기간 이어져온 장마가 끝나고 서울에는 무더위가 찾아왔습니다. 늦은 아침을 챙겨 먹고 한낮의 뙤약볕을 피해 동네의 작은 카페를 찾았습니다. 멀지 않은 거리였는데도 카페에 도착했을땐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죠. 이 카페 구석에 놓인 모니터에는 아름다운 영화들이 무음으로 재생되는데, 그날은 <500일의 썸머([500]Days of Summer)>가 나오고 있었어요. 몇차례 돌려보았던 매력적인 영화라 바로 알아볼 수 있었죠. 영화 속 톰과 썸머는 삐걱거리고 있었습니다. '썸머'와의 관계가 끝을 향해 치닫고 이별의 고통 속에서 톰이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어텀'을 만나게 되는 순간까지 저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어요.
일요일의 충분한 쉼을 누린 뒤 카페를 나서며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어요. 뮤직앱에서 제 취향에 맞게 추천해주는 랜덤플레이를 즐겨듣거든요. 타율이 매번 높은 건 아니지만 그러다 우연찮게 정말 마음에 쏙 드는 곡을 발견할 때면 참 행복하죠. 그날 플레이리스트의 첫 곡은 전진희의 <우리의 사랑은 여름이었지>였습니다.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부드러우면서 침착하고, 잔잔하면서도 섬세한 감성이 느껴져 곧장 제 리스트에도 추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곡의 제목이기도 한 메인가사는 그들의 사랑이 여름이었다고 말합니다. 순간 저는 되묻게 되었어요. '여름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하고요. 영화를 좋아하고 소설도 즐겨읽는 저에게는 계절에 떠오르는 작품들이 많아요. 가령 겨울에 저는 꼭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찾아 읽고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을 기어코 다시 보고 말죠. 봄이 저물어 갈 때 즈음은 이창동의 <시>가 생각나고 가을의 쓸쓸한 기척이 느껴질 때면 영화 <만추>를 찾게 되고요. 그러다보니 봄, 가을, 겨울이란 계절에 심상을 담은 사랑 영화도 비슷하게 기억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유독 '여름'을 로맨스로 담은 영화는 잘 생각나지 않더라고요. 주로 태풍이나 폭우, 바다를 담은 일본영화들이 떠오를 뿐. 비교적 최근에 보았던 루카 구아다니노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만이 여름의 계절감을 첫사랑의 강렬함과 훌륭하게 엮어냈다고 생각해요. 다른 계절에 비해 여름의 사랑 리스트는 어쩐지 부족한 느낌입니다.
왜 여름은 사랑의 계절이 되지 못할까? (여기에는 저의 감상영역이 좁은 까닭도 있겠지만) 뜨거운 여름. 타오르는 태양빛. 녹음綠陰은 투명한 햇볕 아래 더욱 푸르게 빛나고 바다 또한 눈이 부시게 빛의 파편들을 반사해냅니다. 자연과 사물의 색감이 최고조로 선명해지는 환한 계절. 숨막힐 듯한 열기와 끈적거리는 습도의 불쾌함이, 다른 계절에 비해 사랑에는 적절하지 않은 걸까요? 그래서 톰이 <500일의 썸머>에서 사랑의 지혜를 얻고 성숙해지기 위해선 '썸머'를 만나야했고 여름의 열병을 앓아야만 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을 '여름'이라고 말할 때 그 사랑은 어떤 형태일지 궁금해졌습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순간적이지만 강렬한 느낌일까. 삶의 다른 기억들보다 쨍-한 색상으로 부각되는 이야기일까. 여름이 내뿜는 생의 대단한 열기처럼 왕성한 에너지와 열정으로 가득했던 관계일까. 그렇다면 내게는 '여름'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랑의 기억이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하마터면 한낮의 길 위에서 잘못된 골목으로 들어설 뻔한 날이었네요, 오늘은.
저의 겨울 영화 리스트를 알고 싶으시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