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아닌 이들'을 전제로 말해진다
"인민"은 이미 정해져 있는 어떤 무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구축하는 경계선에 의해 구성된다. 그 결과 우리는 "인민"의 존재를 상정하는 어떤 주어진 방식이 포괄적인지 여부를 시험할 필요가 있음에도, 그저 경계를 더 지음으로써 배제된 이들의 존재를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조건에서 자기-구성(self-constitution)을 고려하는 것은 더욱더 문제적인 행동이 된다. 누가 "인민"인지를 확정짓고자 하는 모든 담론적 노력이 다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주장은 일종의 도박이자 종종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행해진다. 따라서 어떤 집단이자 집회, 혹은 조직된 집단이 스스로를 "인민"이라 부를 때, 그들은 누가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는지를 추정하면서,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인민"이 아닌 이들을 구분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담론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실로 누가 "인민"에 포함되는지를 결정하고자 하는 논쟁이 격화될 때, 한 집단은 그들이 생각하는 "인민"을 그 범주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 곧 그들이 생각하는 "인민"을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이들, 혹은 그들이 제안하는 "인민"에 반대된다고 여겨지는 이들과 대립시킨다.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양효실 역,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 pp.10-11.
주디스 버틀러의 새로운 역서가 나왔어요. 미국의 젠더 연구가이자 페미니즘 학자인 그녀의 <<젠더 트러블>>, <<젠더 허물기>>, <<위태로운 삶>> 등은 여성학뿐만 아니라 정치철학, 윤리학 등의 분야에서 필독서로 꼽히죠. 이번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에서는 최근 세계 각국에서 일어났던 집회나 시위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신체, 취약성, 불안정성, 수행성, 공거 등의 개념들을 정치하게 파고들어 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리로 나와 등장한 취약한 신체들이 국민국가나 종교, 민족의 경계를 너머 정치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난해하지만 중요한 개념들과 비판적 성찰들은 대학원 수업이나 학술세미나에서 다루기로 하고 (자기 전에 이런 토론하면 체할 지도 몰라요!) 오늘은 저자의 주장을 참고해 '우리'라는 단어를 함께 생각해봤으면 해요.
한국에 오래 살아 한국말이 제법 능통한 외국인들이 패널로 나왔던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중 한 명이 이런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어요. (희미한 기억에 기대 옮겨보자면) '한국사람들은 '우리'라는 말을 되게 잘 써요. 진짜 죄다 붙이는 것 같은데 처음엔 이해가 안됐어요. 그 '우리'가 대체 누구인지..' 식의. 서양과 비교하여 동양이 공동체중심의 문화가 형성됐고, 사고나 성향 역시 그러한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건 부정하기 어려워요. 개인인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언어권에서 단순한 복수로 '우리'라는 말을 번역한다고 해도, '우리'라는 말이 지닌 특유의 어감까지 살려내긴 어렵죠. 정형화된 언어 습관으로 굳어지기 전부터 공유했던 감정 같은 것이 단어에 서려있으니까요. 한 집단의 일원으로 느끼는 '소속감'과 같은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는 '운명공동체'의 느낌 같은 거요. 그게 혈연이든 학연이든 지연이든 상관없이.
'나'보다 '우리'이길 원하고 '우리'로 행동하길 원하는 경향을 단순히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어요. 하지만 너무나 쉽게 '우리'를 상정하고 지칭하는 사람일수록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우리'에 속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전제로 해서 성립될 수 있는 단어라는 점이요. 위에서 인용한 버틀러의 분석처럼, '우리'는 무한정의 타인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나'라고 말할 때보다 훨씬 포용적이고 민주적인 인상을 주는 '우리'이지만, 사실 '우리'라는 말을 할 때마다 우리에 속하는 자와 우리에 속할 수 없는 자들간의 경계가 암묵적으로 구획되어 버리지요. '우리'가 때론 이기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단어가 내재한 보이지 않는 경계선 때문에 '우리'는 쉽게 차별과 혐오의 단어로 미끄러지고 말아요.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강조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와 대립되는 타인들은 그 모든 주장에서 탈락되고 마는 겁니다.
한국 사회를 우리 사회라고 말할 때, 그때의 '우리'는 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권리와 의무를 지니는 사람을 일반적으로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에는 가령 외국인노동자들은 포함되어 있을까요? 탈북민 혹은 난민들은요? 거리의 노숙자나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우들은 우리의 경계 안과 밖 중 어디에 있나요? 공동체를 지향하는 경향이 반드시 '다름'에 개방적이거나 관용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공동체로 닫혀버릴 위험이 더 큽니다. 한국 사회에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받아온 편가르기와 연줄의 이용, 제식구 감싸기 등의 현상은 오늘날 들끓는 온갖 혐오와 차별의 목소리들의 예고편이었던 듯 보여요. 버틀러가 지적하듯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우리'의 집단-사회, 국가, 민족 등의-에 오래동안 배제되어 온 보이지 않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내는 것이 그 문제들을 해결할 시작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