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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Nov 08. 2020

한없이 가벼운 인간, 영겁의 시간

장면의 탁월한 묘사로 말하는 제임스 셀터 소설 <가벼운 나날> 


 <가벼운 나날>은 맨해튼 교외 지역에서 살아가는 비리와 네드라 벌랜드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강을 낀 초원을 넓은 정원 삼아 놓인 그들의 호화로운 집은 매일 밤 친구들을 초대해 이루어지는 저녁 식사 파티가 열립니다. 비리는 건축가이자 성실한 아버지, 네드라는 사람과 파티를 좋아하고 잘 해내는 아름다운 아내이자 어머니입니다. 누구나 동경할 만한 근사한 부부이지만 화려함의 이면에는 사랑과 헌신이 고갈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기만하되 배반하지는 않으면서 화목한 가정을 유지해나가죠. 하지만 균열이 난 위태로운 관계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소설은 이들의 이십대 후반 결혼생활부터 결국 이혼을 하고, 이혼 후에도 친분을 유지하는 긴 시간을 그려냅니다. 



 이들의 지난한 결혼생활에서 극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불씨가 될 수 있을 법한 사건들조차 둘 사이의 암묵적인 용인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립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은 채 그들은 시간이 흘러가도록 놔둡니다. 방임이 세계와 타인을 다루는 지혜로운 어른의 태도라고 믿는 듯 하죠. 그러나 그 쿨-함은 결국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삶에 대한 열정이 식은 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들의 세계가 점점 무너지고 결국 파국에 다다르게 되지만, 그들은 가장된 평화를 유지하며 이를 외면합니다. 여기서 이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이 생겨나는데, 바로 인물이나 사건보다 ‘장면’이 가장 생생하면서 강렬한 소설적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미스터리였다. 숲과 비슷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고 묘사될 수 있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흩어져 빛과 그림자로 조각났고, 그 빽빽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형태가 없었고, 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이 어디나 가득했다. 이국적인 소리와 쏟아지는 햇빛, 무성한 잎사귀, 쓰러진 나무,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에 달아나는 작은 짐승들, 곤충, 고요함, 그리고 꽃. 

이 모든 것은 제각각이면서도 밀접하게 엮여 있고, 보이는 것과 달랐다. 실제로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비리의 말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p.51)




 작가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쉽게 보여지는 겉이 아닌, 그 이면의 진실입니다. 그럴싸한 비리와 네드라의 삶 너머에 존재하는 비뚤어진 욕망과 비겁함, 비굴함 같은 날 것을 보려고 하죠. 그러나 작가는 비리와 네드라의 내면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지 않습니다. 전지적인 화자가 되어 그들의 민낯을 폭로하지 않아요. 그 내면에 가닿는 것을 포기하거나 단념하면서 그들이 놓인 장면에 대한 묘사로 미끄러지죠. 인간의 유약함에 대한 두려움, 혹은 그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지 않겠다는 정중함이였을까요. 작가는 정확하고 간결한 문장과 섬세하고 예리한 묘사로 그 불편한 진실을 에둘러 그려냅니다.  

 


 소설가 리처드 포드는 <서문>에서 이 소설이 ‘점차 마멸되어가는 미국 문화를 차갑게 해부한 단면을 보여주고, 그 시대 즉 20세기 중반을 통과하는 표본적인 삶’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소설에 모든 아름다움이 ‘삶의 가치를 사소하게 여기는 태도, 특히 인간의 진정한 욕구를 사소하게 여기는 태도, 유아론적 입장, 과도한 감상주의, 거짓된 경외, 진실 앞에서 진지하지 못한 태도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태도들에 대한 비판’이며, 작가는 소설의 스타일로써 ‘윤리적인 힘을 도출’해냈다고요.  원제 ‘Light years’는 ‘빛과 가벼움의 세월’과 ‘몇 광년처럼 긴 세월’이라는 뜻이 포개져 있다고 합니다. 소설을 옮긴 번역가 박상미는 소설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빛과 시간의 존재를 염두에 두며 ‘가벼운 나날’로 옮겼다고 밝힙니다. 영겁의 시간은 때론 가장 찰나의 순간으로 포착하게 되곤 합니다. 소설에서 비리와 네드라를 포함한 인물들은 재빨리 과거가 되지만, 장면 장면들은 생생한 현재형으로 박제되듯 묘사돼요. 그 풍경이 시간의 영속성- 인간 생의 보편을 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단풍이 계절의 무게를 못 이겨 우르르- 떨어지던 오후. 양손을 얹은 <가벼운 나날>의 표지에는 늦가을의 냉랭함이 서려있었습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의 무게는 인간의 남모를 심연에 비하면 너무나 가볍습니다. 그러나 피고 지고 다시 피는 세계 속에서 우리의 삶은 별 수 없이 가벼운 점일 뿐이겠죠.  저는 이 소설을 읽고 견딜 수 없이 쓸쓸해지고 말았고, 남은 가을을 좀처럼 유쾌하게 바라보긴 어려울 것 같아요. 우리가 바깥의 풍경으로부터 느끼는 감응은 실은 우리 마음의 정서가 깊이 투영된 풍경이기 때문이죠. 문득 저무는 가을의 풍경을 여러분은 어떤 온도로 느끼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이 말은 즉,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괜찮은지 안부인사를 건네고 싶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공유한 것은 행복뿐이라는 듯, 그들은 다음 날을 계획했다. 이 평온한 시간, 이 안락한 공간, 이 죽음. 실제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 접시와 물건들, 조리 기구와 그릇들은 모든 부재하는 것의 삽화였다. 과거로부터 밀려온 조각들이고 사라져버린 몸체의 파편들이었다.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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