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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Nov 13. 2020

부산 여행의 단편

짧은 여정만큼 짧게 남기는 소회

 10월의 마지막 주, 2박 3일의 일정으로 훌쩍 부산을 다녀왔습니다. 사실 떠나기 전까지 고민이 많았어요. 코로나도 걱정이었고,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기간 동안 비대면 온라인 진행이긴 하지만 대학원 수업도 세 개나 있었거든요. 일찌감치 예매했던 김포-김해 항공권을 취소하고 다시 사기를 반복하면서, 떠나는 전날밤까지도 망설였던 것 같아요. 무리한 여정이 될 게 뻔하면서도 떠났던 건 꼭 보고 싶었던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과 부산 비엔날레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테니까요(부국제의 영화는 시간이 지나 국내 개봉을 할 수도 있지만). 다음의 대안이 없다는 건,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사실은 강력한 기제가 되어서 무모한 결정을 내리게 하곤 하잖아요. 그렇게 저는 김해행 마지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김해공항에 내려 전철을 타고 해운대에 도착했을 땐 9시가 조금 넘었더군요. 해변에 와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물거품이 없었다면 바다와 모래사장의 경계를 눈치챌 수 없을 것처럼, 부산의 밤은 컴컴했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인파가 가득한 화려한 해운대 백사자과 인근 번화가를 기억하고 있다가 이번에는 휑-한 쓸쓸한 풍경들을 봐야했다



 국내여행보다 해외여행을 더 많이, 자주 했던 저에게는 부산이 한국에서는 제일 추억이 많은 도시입니다. (고향인 제주와 10년 넘게 살고 있는 서울은 논외로!) 영화를 좋아했던 20대에는 부산국제영화제로 부산의 낮과 밤을 휘적거렸었고, 공연 PD일을 하면서는 기획공연으로 수차례 내려왔었어요. 주로 야외 페스티벌 제작을 맡았었기 때문에 부산에서의 공연 기억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아요. 고생을 엄청 했거든요. 해운대 해변에 무대를 세우고 공연을 하는 기간은 한국의 기록적인 폭염이 닥쳤고, 영화의 전당 야외 무대를 진행할 때는 어찌나 춥던지요. 애꿎은 날씨뿐 만 아니라 갑작스런 제재에 운영 방침을 바꿔야 하는 등 당일 현장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던 공연들이라 고생을 같이 한 동료들은 모두들 그 때의 부산을 악몽, 또는 지옥으로 회상하죠. 시간이 지나 기억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들을 다시 밟으니 맘이 이상하더라구요. 



 이번 부산이 조금 특별했던 이유는 오롯이 혼자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힘겹게 일을 했던 때나 즐겁게 휴양하는 때에도 부산은 언제나 동료나 동행이 있던 도시였거든요. 이번에는 영화제와 비엔날레, 전시회들을 혼자 바삐 다녔으니 (잠깐 지인을 만나긴 했지만) 함께였던 기억만 있는 도시의 구석구석들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기분에 잠길 틈 없이 바빴던 일정이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숙소에서는 잠만 청할 예정이라 해운대 근처의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에 묵었어요. 미술관 개장 시간에 맞춰 가서 폐장할 때까지 전시를 보고, 밤에는 영화제 영화를 봤어요. 다음날도 현대미술관과 영도, 부산 도심을 바삐 오가며 비엔날레를 관람하고 저녁 비행기를 타고 다시 서울로 왔답니다. 중간중간 온라인으로 수업도 듣느라 시간을 촘촘하게 쪼개써야 했고,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게 제대로 된 끼니였습니다. 


코로나 여파로 좌석의 40~50%만 오픈했던 부국제. 그래서 영화제 느낌이 좀처럼 나지 않는, 고요하고 한산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아끼면서 봤던 영화와 전시들이 좋았기 때문에 후회는 없지만,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는 부산에서 미식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다는 건 역시 아쉬워요. 비엔날레의 마지막 작품을 BNK부산은행 아트시네마에서 감상하고 나왔을 때 김해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까지 20여분 남았더라구요. 식당에서 밥을 먹기는 부족한 시간이여서 버스정류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맞닿아있는 남포동 시장의 팥빙수 거리로 들어갔어요. 손님이 아무도 없는 매대에 앉아 단팥죽을 먹었어요. 급하게 먹느라 입천장이 데었는데, 아주머니는 종일 쫄쫄 굶었다는 제 말에 한국자를 듬뿍 떠서 더 주시더라구요. 달달한 팥죽에 부산 시장 인심이 더해지니 마음까지 따뜻하게 채워졌습니다. 아주머니는 올해 장사가 너무 힘들다고 속상해하셨어요. 이후로 발 디딜 틈 없던 시장은 황량해졌다고 말이죠. 저와 대화 중에 지나가는 행인이 있을 때마다 얼른 몸을 일으켜 호객행위를 하시는 아주머니를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그랬어요. 부산 어디를 가도 인적이 드물어 당황했으니까요. 텅 빈 풍경은 전국 각지의 시장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곳을 터전으로 삼는 상인들의 삶의 곤란을 야기하면서요.   


인절미 토핑도 푸짐하게 올려주신 아주머니. 이 한 그릇이 고작 3000원. 팥빙수 거리에서는 여름엔 빙수, 겨울엔 단팥죽을 파는데, 올해는 하루에 교통비도 남지 않는 날이 많았다고


 익숙한 도시에서 새로운 기억들을 쌓고 그렇게 돌아왔습니다. 저한테는 여행지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꼭 한번 가고 싶던 곳-그 한번으로 충분한 곳과 오래 머물고 싶은 곳-가능한 만큼 자주 가고 싶은 곳으로요. 대부분의 해외 여행지는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한번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행운으로 여기며 만족하죠.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고, 가서도 오래 머물고 싶은, 그러니까 여행지 이상의 애정을 갖게 되는 곳이 있는 것 같아요. 반면 국내는 맘만 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지잖아요? 그럼에도 어쩐지 맘이 가지 않는 곳들이 많은데, 부산은 이번 여정으로 제게 언제고 다시 가고 싶은 도시로 자리잡게 된 것 같아요. 도시 속 추억이 겹겹이 쌓이면서 특별한 관계로 맺어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물론 물떡과 밀면과 씨앗호떡, 비빔당면.. 제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들도 제대로 한몫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하고 싶고 보고 싶고 먹고 싶은 것들의 목록이 많아, 그 소망과 기대가 저를 다시금 부산을 찾게 하겠죠?  


(좋았던 작품 이야기는 곧! 빌 비올라 <조우> 전시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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