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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Dec 02. 2020

너무 늦지는 않았을 기록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의미있는 복기

 요 몇 주는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일이 중요하든 사사롭든 간에 수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쳤다는 점에서 해일이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평정심이 흔들릴 만큼 풍랑이 거센 나날들이었어요. 해야할 일들이 물리적 시간과 제 역량의 한계를 초과해 넘쳐흘러 들어오고. 일상의 균형도 무참히 깨졌죠. 밤이 되면 일부러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아침의 알람은 한층 더 엄격해졌습니다. 끼니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려 거르기 일쑤였지만, 한번 먹으면 폭식이 되어버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직격탁이 가해져 종일 머물러도 아쉬운 학교 도서관까지 폐쇄됐지 뭐예요. 오늘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인지 기억하지 못하고 모든 일의 D-day를 기준으로 남은 시간을 셈하며 지냈네요. 능력과 능률에 대한 좌절이 매순간 찾아왔지만, 그걸로 진지하게 우울해지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졌습니다. 꾸역꾸역 해내며 버틸 수 밖에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숱한 밤을 지샌 책상



 그리고 마침내 조금은 한숨 돌릴 수 있는 기점이 찾아왔습니다. 노트북 전원을 끄고 책을 덮었습니다. 아직 오후의 햇빛이 남아있는 한강으로 나갔지요. 9월부터 이틀에 한번 뛰던 러닝은 11월 들어 횟수가 확 줄었거든요. 바빴다는 핑계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지쳐있기도 했고 훌쩍 추워지기도 해서 움츠려 있었던 것 같아요. 오랜만에 달리니 참 좋았습니다. 그동안 무리를 해서라도 뛸 걸, 하는 후회도 들더라고요. 두껍게 껴입은 러닝복 때문에 이전보다 무거운 몸으로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동시에 몸의 활력도 살아났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오래 뛰고 돌아와 따뜻한 샤워를 했어요. 채 마르지 않은 머리로 따뜻한 차를 마셨구요. 밤의 어둠으로 빨려들어가는 마지막 빛들이 차 위에 어른거렸습니다.


오후의 한강을 달리면 풍부한 가을의 색깔을 만날 수 있어요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동안 모자랐던 잠을 보충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규칙적이고 적당한 수면이 삶의 질에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저는, 부족한 잠을 몰아자는 것으로 컨디션을 회복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땀을 흠뻑 흘리고 개운해지자 어쩐지 일찍 잠드는 게 아깝게 느껴지더라구요. 저녁이란 길다고 할 수도 짧다고 할 수도 없는 시간을. 그래서 저는 다시 책상에 앉아 책을 열고 노트북을 켰어요. 걱정마세요. 그날의 휴식을 위해 제가 멈췄던, 공부하던 마지막 부분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니까요. 대신 다른 지점들로 갔어요. 재밌어서 더 보고 싶었지만 우선 순위에 밀려 넘어가야 했던 부분들로요. 그리고 미뤄두었던 기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레포트나 발표원고에는 쓰일 수 없었던 나의 사소한 사건들, 느꼈던 감정들.




 기록은 사라지고 말 것들을 붙잡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죠. 생생한 순간들을 바로 옮기지는 못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기억들로 한달의 이야기를 써내려갔습니다. 그 나날들이 희미해지기 전에, 간신히. 제겐 한달이란 시간을 복기하는 계기가 되었죠. 약간의 시간적 간극을 두고 기록하는 장점은 생각이 침전된 결과라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이후의 경과 속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의미를 곱씹게 되잖아요. 그때 당시에는 크게 느꼈던 부분이 사실은 별거 아니였단 걸 알게 되기도 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다시금 반성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지점에 대해 내 나름의 설명을 얻게 되기도 하죠. 다시 회상하는 과거는 그때 그 순간 있었던 일 그 자체가 아닙니다. 지금의 나를 통해 재구성된 결과에 가깝죠. 그러니 과거만큼이나 그 과거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나의 태도가 중요하겠죠?


 저는 오늘도 앞질러 간 날들을 불러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벌어진 간격을 따라잡기 위해서 지나간 날들의 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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