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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Dec 30. 2020

서로의 속도를 헤아리는 사랑

함께 가야한다면 배려가 필요해요

 남쪽의 섬에는 미처 한파가 오지 않았던 어느 겨울. 엄마와 아빠와 함께 제주 서쪽의 바르메 오름을 올랐습니다. 원래는 많이 알려진 큰녹고메나 작은녹고메 오름에 오를 계획이었지만 길을 잘못 들어 이 오름 입구에 도착하고 말았어요. 차에서 내려 바라보니 녹고메 오름 형제들의 능선이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단념은 빠르고 유쾌했어요. 기왕 오게 된 김에 올라가보자는 데 마음이 모아져 우리는 바르메 오름으로 들어섰죠. 




 오름은 그리 크지도 높지도 않았어요. 설악산과 관악산, 북한산 정상을 찍었던 등산의 감각을 몸이 아직 기억하고 있던 덕분인지 제게는 가뿐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버거워했습니다. 초입의 급한 경사로에서부터 숨이 차 힘들어하시더군요. 엄마는 무릎을 잡고 서서 ‘천천히 따라 잡을 테니 먼저 가’ 라며 손을 흔드셨습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위해 자주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저 아래 수풀 속에서 엄마의 모습이 보일 때까지 기다리셨죠. 엄마의 정수리가 희끗희끗 보이면 그때서야 안심하고 다시 걷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서로의 속도를 헤아려주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잘 익은 사랑 같았어요. 사실 혼자일 때 속도는 아무래도 상관 없잖아요. 내가 내키는 데로 욕심을 내거나 여유를 부려도 되니까요. 속도의 차이가 문제가 될 때는 함께 걷거나 뛰는 사람이 있을 때입니다. 이 여정의 끝까지 함께 한다는 동반자적 의식이 있을 때 ‘너’와 ‘나’가 포개지는 ‘우리’의 속도가 중요해지는 거죠. 느린 사람에 대한 배려 없이 한 사람이 마구 속도를 내어도, 앞선 사람의 마음을 외면하며 한껏 게으름을 피우거나 포기해버린다면 그 동행은 깨지고 말 거예요. 그래서 각자의 속도에서 조금씩 서로를 배려하며 함께의 리듬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항상 같은 속도로 나란히 걸을 수는 없어도, 앞섰다가 기다리고 뒤쳐졌다 따라잡는 식으로 말이예요.



바르메 오름 분화구의 둘레길 정상. 날이 좋아 제주 오름들의 겹겹이 포개진 능선들이 멀리까지 보였답니다. 햇살 아래 억새들의 반짝임은 말할 것도 없구요 :)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관계가 그런 것 같아요. 모두가 저마다의 속도를 가지고 살아가요. 한 사람이 절대적인 속도를 가지는 것도 아니죠. 능숙하고 좋아하는 일을 할 땐 재빨리 해내지만, 하기 싫거나 어려운 일을 할 땐 좀처럼 능률이 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도 차이가 납니다. 사람과 사람간의 속도를 맞추기 가장 어려운 건 아무래도 마음의 세계인 것 같아요. 감정의 절대적인 크기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감정이 고정된 게 아니라 늘 변화하는 것이라면 – 결국 마음이 깊어지고 짙어지는 속도가 엇비슷해야 두 마음이 공명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 차이가 관계의 균형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전 생각해요. 만약 이때 서로에 대한 배려 없이 상대에게 자신의 속도에 무조건 맞추기를 강요한다면, 그 관계는 겉잡을 수 없이 위태로워질 거예요. 기약없이 기다려야 하는 사람은 불안과 외로움에 지쳐버릴 테고, 사력을 다해 따라 잡아야 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탈진하고 말겠죠. 




 예상했던 시간보다 길어졌지만 결국은 엄마 아빠는 함께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아빠에게는 답답할 수도 있었던 기다림의 시간과 엄마에겐 버겁고 포기하고 싶었을 힘겨운 순간들 끝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놓여 있었어요. 서로에게 고생했다, 고맙다고 말해주는 두 분의 모습도 그 풍경만큼 예뻤고요. 긴 세월 부단한 노력 끝에 맨들맨들해진 사랑의 표면. 곧 저물 2020년의 저에게도 그 사랑을 건네고 싶었어요. 꿈도 많고 욕심도 많은 저는 저 자신을 조금 미워했던 것 같기도 해요. 의욕이 앞선 저와 그걸 제대로 다 따라잡지 못한 저 사이의 완연한 속도차가 있었던 거죠.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저 인걸요. 계속해서 끌어안고 나아가야 할 나. 더 잘하라고 채찍질 하는 저와 그러지 못해 위축되고 괴로워하는 제가 불화(不和)의 관계로 새해를 맞이하게 놔둘 순 없으니까요. 올 한해 수고 많았다고 토닥여주려고 합니다. 최선을 다했으니 이만큼 올 수 있었던 거라고. 그리고 새해의 햇살을 사이좋게 맞고 싶어요. 곧 달리기를 시작해야 할 테니 말이예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엇갈린 속도로 어긋나야 했던 모든 이들과 화해하며 (적어도 용서하며!) 2021년을 맞길 빌게요. 멀리서 여러분게 그 용기를 보냅니다! 



평소에는 사소한 문제로 아웅다웅 하다가도 결정적일 때는 속깊은 다정함을 숨기지 못하는 엄마아빠. 이 커플을 보고 자라 제가 눈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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