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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Aug 09. 2021

영화 <옥자> 뒤로 남겨진 질문

김미루의 <돼지, 내 존재의 이유> 연작 시리즈로부터 (3)

*이 글은 이전 글들과 이어집니다. 이전 포스팅(위 링크)을 읽으시면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실 거예요. 

**영화 <옥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다면 영화를 먼저 보신 후 읽어주세요 :)



   

순수하고 용감무쌍한 미자와 개구쟁이지만 애교도 많은 옥자 (출처: 네이버 영화 이미지)

 



  전시를 보고 와서 다시 찾아본 영화가 있습니다. ‘돼지’와 관련된 영화로 많은 분들이 떠올리지 않을까 싶어요. 2017년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옥자> 말이예요. 거대한 몸집의 돼지가 ‘옥자’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던 건 식용고기가 될 가축이 아니라 엄연한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산골에서 할아버지와 외따로 사는 미자에게 옥자는 감정을 나누는 가장 친밀한 존재입니다. 옥자는 미자의 간단한 말이나 동작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는 걸 너머 눈을 맞추고 살을 맞대며 교감을 하죠. 영화 도입부에서 미자와 옥자의 멋진 호흡을 보여주는 계곡의 장면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애정과 신뢰를 통해 인간과 동물, 주인과 가축이라는 구분 없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관계를 보여주니까요.  




   그러나 옥자는 루시 미란도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유전자조작으로 만들어낸 축산용 돼지입니다. 하지만 회사는 이를 자연적으로 발견된 슈퍼돼지로 칭하며 세계 각지의 축산농가에 이 돼지들을 보급하는 프로젝트를 벌입니다. 각 농가의 고유하면서도 자연친화적인 방식으로 돼지를 사육한다는 포장이지만 실은 최고의 육질을 얻기 위해 정기적으로 품질을 측정하고 관리해왔죠. 미란도는 자신의 회사가 생명윤리를 존중하고 친환경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애초에 도축을 통해 고기를 상품화하는 산업에 가담하면서 생명을 사랑하는 윤리적인 회사라고 지칭하는 것은 모순적이예요. 지하 깊숙하게 감옥같은 동물 실험실을 만들고 축산공장 곳곳의 폭력성을 철저히 감춘채 마케팅에 공을 들여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죠. 



각 캐릭터들이 옥자에게 투영하는 마음을 잘 압축해낸 포스터! 영화에서 미란도 자매를 열연한 1인 2역의 틸다 스윈튼과 제이크 질렌할, 스티븐 연의 익살스런 연기도 또 다른 재미.


   어쨌든 옥자는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미란도 기업에 회수되어야 하는 자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가족이 된 미자는 완강히 반항해요. 기업에 맞서는 미자의 편에 서서 힘을 보태는 중요한 인물들은 ALF(Animal Liberation Front, 동물해방전선)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착취로부터 동물의 완전한 해방을 목표로 하는 단체로 미란도 기업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옥자를 활용합니다. (미자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에서 자의적으로 통역을 하는 장면과 그 비밀을 고백하고 응징받는 ALF 단원의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지점이예요. 리더인 제이가 ‘통역은 신성한 거야’라고 하는 말은 더욱 의미심장하죠. 다른 언어간, 혹은 언어/비언어간, 다른 종간의 소통에서 의미는 왜곡이나 소실없이 전달되는 것은 연대의 기반이 되니까요) 옥자는 증거를 확보할 카메라를 장착하고 미란다 기업의 컴컴한 실험실로 들어갑니다. 처참한 학대를 폭로하고 기업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감응할 만한 폭력적인 영상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희생양이 필요하죠. 그게 옥자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옥자>는 간단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들을 담아내고 있어요. 공장식 축산산업의 폭력(봉준호 감독은 조사차 북미의 대형 축산공장 여러 곳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그때 그곳에서 느낀 잔혹함을 전부 담아낼 수 없었다고 해요. 텍스트나 이미지로만 축산의 참혹성을 접한 저는 감히 가늠이 되지 않네요)과 유전자조작 식가공 산업의 문제. 친환경 가치와 동물보호, 생명윤리가 산업화되고 상업화된 기업의 언어가 되어버릴 때, 그 의미는 어떻게 퇴색되고 무엇을 가리게 될까 등등. 특히 옥자의 생사를 걸고 미자와 미란도의 새로운 대표 낸시 미란도가 벌인 거래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ALF와 미자의 갈등이 보여줬던 것처럼, 급박한 위험에 처한 ‘나의’ 소중한 대상을 구하는 것이 맞는지, 혹은 그 대상을 희생하더라도 비슷한 위험에 놓일 모두를 구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윤리적인 고민을 안게 되죠. 거기다가 논리적인 설득이나 감정적 호소는 통용돠지 않고 오로지 ‘돈’으로만 거래가 되는 자본주의에서 개인에게 대안적인 전략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다소 암울한 질문까지도요.* 




   봉준호 감독은 <옥자>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영화는 아니며 그렇다고 반자본주의를 역설하는 영화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영화의 시작에 대해서 감독은 같은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은 당연히 가족으로 여겨지고 어떤 종은 식용 고기로만 인식되고 소비되는 경계를 질문하고 싶었다고 해요.*** 이 영화는 동물과 환경, 산업과 기업이 대립의 복잡하고도 모순적인 구조를 보여주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몫은 관객에게 달린 거겠죠. 무사히 산골로 돌아와 (공장에서 구조한 아기 돼지까지) 일상의 평화를 되찾은 미자 가족에 안도할 것인가, 이들 가족의 평화로운 식사 장면 뒤로 여전히 끝없이 번식되고 실험되고 죽여지며 고기로 가공되는 슈퍼돼지들에 불편해질 것인가. 그 수많은 돼지들을 누군가의 ‘옥자’로 상상해보는 것은, 장성준 작가가 빚은 ‘흙으로의 돼지’나 김미루 작가가 몸을 포갠 맨살의 돼지를 ‘고기 아닌 생명’으로 보는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을거예요.    



<<참고기사>>


*<옥자>에 함의된 동물윤리와 자본주의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꼼꼼하게 설명해주는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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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70702.9900200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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