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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Aug 12. 2017

동물원, 동물, 그리고 확장의 문제

<미술관 동물원> 전시를 다녀와서

공공 동물원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은 일상 생활에서 동물이 사라지게 되는 시기였다. 사람들이 동물을 만나고 관찰하고 구경하러 가는 동물원은, 사실 그런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곳이다. 
 - 존 버거



 전시에 참여한 박승원 작가가 이 말을 선택해 자신의 섹션에 걸어놓았다. 나는 동물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슷한 의미에서 자연사박물관도 끔찍이 싫어한다. 철장 안에 살아있는 동물을 가둬놓은 것도, 동물을 박제해 유리관 안에 전시한 것도 싫다. 그것을 그곳에 있게 한 인간의 폭력적인 우월감이 싫다. 그것들이 바깥에서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생각을 교묘하게 규정한다는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살아있든 죽어있든 비슷하게 무력한 그 동물들을 바라볼 때 즐겁기보단 씁쓸해진다. 한 때 유럽의 동물원이나 미국의 박물관에는 살아있는 흑인이 전시된 적 있었다. 



 나는 한때 채식을 했다. 4년 전 일이다. 그때 한강의 <채식주의자> 책을 읽었다. 식물이 되고자 했던, 고집스런 평화주의자였던 여자가 이상하게 내 의식 깊숙한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유럽여행을 하면서는 채식주의자인 호스트를 유독 많이 만났다. 그들과 함께 요리를 하고 식사를 하며, 나는 그들의 신념을 함께 삼켰다. 스트레스 때문에 약해진 소화기관도 고려대상이 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내가 채식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전환점이 있던 것도 아니고 결연한 의지가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나로선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물 흐르듯 당연하게. 지금은 억지로 거부하진 않지만 여전히 즐겨 먹진 않는다.






 서울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미술관 동물원>을 간 데에는 이런 나의 배경이 존재했다. 폭염과 폭우가 되풀이되는 여름 내내 미루고 미루다 폐관 직전에 가긴 했지만 말이다. 정영목 관장은 전시 의도에서 동물원을 ‘다소 즐겁고 밝은 이미지’의 공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잔혹함과 권력, 그리고 폭력이 깃들어 있는 장소’라고 소개했다. 전시는 동물이란 오브제로 인간의 폭력을 문제시하거나 현대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작가를 고루 소개한다. 나는 아무래도 전자의 작품 앞에서 더 오래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선환 작가의 <데드라인> 작품은 다시금 내게 채식으로의 길이 왜 당연했는지를 되새기게 만들었다. 이동현작가의 <Plasticbag dog>나 <Plasticbag elephant> 작품은 인간의 이기심이 우리의 욕구와 편의에 따라 동물을 이용하고 있는 최근을 생각해보게 했다.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이가 많아지고 길냥이나 길강아지에 대한 관심과 보호의 손길도 늘어났다. 다행이다. 그러나 아직 그 애정은 ‘반려동물’에만 한정되어 있는 듯 하다. 발치에서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떠는 반려견과 도착장에서 도축되어 식탁에 올려진 식용 소를 같은 존재라고 여기진 않으니까. 내 가족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인류 전체로 확장시키기 어려운 것처럼. 귀여운 애완동물에 대한 애정과 존중이 동물 전체의 종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오랜 시간 축적되어 형성된 문화란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며, 그래서 변하기 쉽지 않다. 나는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되어야만 완전한 평화가 이뤄진다고 믿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쉽지 않은 ‘확장’의 과제를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당장의 변화는 없겠지만 우리 의식 저 편에, 사회 저 심층에, 미세한 출렁임이 일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한 동물을 사랑하기 전까지 우리 영혼의 일부는 잠든 채로 있었다.” 우연히 읽은 일간지 문화면에서 이 전시를 소개한 기자도 이 말을 인용했다. ‘확장’에 대한 고민은 잠든 영혼의 일부를 깨울 수 있는 첫 번째 열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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