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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Aug 17. 2017

16-1. 아우슈비츠, 끔찍하고 끈질긴 잔해를 보다

폴란드 크라쿠프

 

 


 그날 아침에는 비가 부슬부슬 왔다. 캐리어 바퀴가 구르면서 인도에 파인 홈에 고인 물들을 튕겨냈다. 비스와강을 건너고 나온 첫번째 정류장에서 내렸다. 강변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강의 휜 등 너머로 붉은 성벽에 둘러싸인 바벨 성이 보였다. EASTER 월요일이라 시내는 죽은듯이 고요했다. 생동감이라곤 강변을 따라 조깅을 하는 몇 사람에게서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정적인 풍경이었다. 나는 강변을 바라보며 어제 산 사과를 베어 먹었다. 장소는 쉐라톤 호텔 앞. 약속한 8시 50분이 되기도 전에 한 사내가 말을 걸었다. 예약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투어를 맡은 운전기사였다. 검은 벤 안에는 서른 후반으로 보이는 중국인 여자 1명과 남자 2명이있었다. 나는 차에 올라 타면서 그들에게 가볍게 묵례를 했다.


 투어는 나까지 네 명이 전부였다. 크라쿠프에서 아우슈비츠나 비르켄나우 수용소는 개인으로 방문할 수 있지만 제약 사항이 많다. 교통비와 입장료, 편의를 고려해봤을 때 현지 에이전시의 투어로 참여하는 것도 괜찮았다. 토요일은이미 예약이 꽉 찼고 일요일은 EASTER로 수용소가 열지 않았기 때문에, 월요일 두 곳의 수용소와 소금광산까지 들러야 했던 내게 투어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원래 알아봤던 2 곳의 에이전시마저 인원이 다 차서 나는 그들이 소개해준 다른 에이전시로 겨우 투어를 참여할 수 있었다.


 차는 곧장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Km 즈음 떨어진 오시비엥침 Oświęcim 도시에 있다. 차로 1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 운전기사는 하루 투어일정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한 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틀어주었다. 다큐멘터리는수용소 내 기록을 담당했던 독일 군사가 공개한 촬영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기록이란 목적에 충실한 영상에는 당시의 실상이 가감 없이 담겨 있었다. 차마 볼 수 없는 장면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눈을 질끈 감으면서 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연출된 장면도 아니고 효과가 덧입혀진 것도 아닌 현실의 민낯이 이렇게 잔혹할 수 있는 것인지. 이렇게 잔혹해도 되는 것인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약 110만명이 죽었다고 추산된다. 이 수는 너무 거대한 나머지 내게는 오히려 한두자리 숫자보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평범한 사람이 비극으로 느낄 수 있는 보통의 역치를 훨씬 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상 속에서 나는 그 일부의 사람들을 보았다. 숫자나 사진으로 박제되지 않은, 당시 살아있던 그들을 만난 것이다. 삐쩍 마른 그들은 눈빛만은 야위지 않고 분명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과 마주할 때 내게 110만명은 비로소 거대한 숫자가 아니라 한 명 한 명 평범한 인간의 무더기가 되었다.


 영상이 끝나고 운전기사는 라디오를 틀었다. 그가 맞춘 주파수에서는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음악은 차 안의 가라앉은 분위기에 섞이지 않았다. 비포장도로 위에서 차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한번도 멀미를 해본 적 없는 내가 구토가 올라올 것 같은 불쾌함을 느꼈다. 흐렸던 하늘이 점차 파란 낯빛으로 개고 있었다. 차 안으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어떤 감흥도 없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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