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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an 01. 2018

기어코 해돋이를 나간 이유

2018년 새해 첫 해의 의미

 12월의 막바지에 나는 조금 진부한 우울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파는 너무 빨리 찾아와 옹송그린 채 보내야 하는 날들이 대부분이었지요. 얼어붙은 길을 미끄러질까 조심히 걸을 때마다 도착지는 늘 멀게 느껴졌고, 따듯한 안식처에서는 엉덩이를 떼기가 어려웠습니다. 게으름이라 부를 순 없겠지만 나태와 회피의 기운이 나를 뒤덮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게 다 혹독한 추위 때문이야. 나는 핫팩을 배와 등에 하나씩 붙이며 투덜거렸습니다. 여름의 무더위가 주는 무기력과 불쾌감과는 다른, 체념과 분노는 겨울 한파가 만드는 수렁이었습니다. 



 한파와 폭설이 한바탕 몰아친 뒤 갑작스레 온화해진 날씨와 함께 크리스마스가 찾아왔습니다. 눈이 녹아 곳곳이 진흙탕이었고 눈 대신 비가 청승맞게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랑곳 없이 캐롤은 울리고 트리의 전구는 반짝였죠. 사람들은 한층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들고 오갔는데, 나는 그 모든 게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추위로 비뚤어진 마음은 행복하고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어요. 크리스마스의 온기와 들뜬 분위기는가장 무도회 같았고 나는 크리스마스가 끝난 뒤 버려진 것들에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제 때 철거되지 못한 장식품과 시즌 상품들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17년이 가기 전에 마무리하고 싶었던 이런 저런 일들은 우울에 밀려나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잠이 들었습니다.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새벽에는 식은 땀을 흘리며 깨기를 반복했습니다. 체한 것도 굶주림 때문도 아닐 텐데 복부의 묵직한 통증은 이불 안에서 몸을 비틀게 만들었습니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 맞춰놨던 알람이 울리기까지 뜬 눈으로 새벽을 보내고 나는 이미 여명이 비치기 시작한 일곱시쯤 집을 나섰습니다. 자전거 덮개를 열자 빗물이 고여 얼은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거렸습니다. 차가 드문 도로를 천천히 달렸습니다. 한강공원으로 나가는 나들목은 오르막 하나만 건너면 바로였습니다. 



 강변을 따라 달리다가 시야가 트인 지점에 멈춰 자전거를 세웠습니다. 아침산보를 하는 사람들도 꽤 되었고 강변 기둥에 붙어서 일출을 기다리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언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나도 동쪽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에는 어슴푸레 푸른 빛과 노란 빛이 스며들어 있었지만 아직 순수에 가까운 도화지였습니다. 고요한 한강은 빛을 잔잔하게 반사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천천히 지평의 경계가 붉어졌습니다. 끄물끄물, 마치 생명 같은 움직임으로 해는 떠올랐습니다. 화폭의 색채는 강렬해졌고 동쪽을 바라보던 모든 이들의 염원과 다짐도 앞다퉈 쏟아졌겠지요. 강에서 새해 첫 해를 맞이한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수선을 떨지 않았습니다. 향을 든 아주머니는 오래도록 합장을 했을 뿐입니다.



당인리 한강변에서의 해돋이





 새해 첫 날의 해가 어제와 다를 리 없고, 내일도 똑같이 해는 뜹니다. 똑같지만 오늘이 특별할 수 있는 건 부여하는 의미입니다. 별 다르지 않은 하루가 되풀이되고 엇비슷한 달이 쌓여가며 계절은 반복됩니다. 끝없는 순환에서 새로운 시작점을 정해놓은 것은 두서 없이 늘리기만 했던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행위와 비슷한 것 같아요. 이야기는 계속 되겠지만, 이어져왔던 것을 맺고 마치지 않는 이상은 신선한 전환은 일어나기 힘드니까요. 삶은 계속 되겠지만, 지난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다짐을 하기 위해 우리는 신년을 거창하게 맞이합니다.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도 기어코 한강변에 나온 나의 마음도 그러했습니다. 연말의 우울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의미가 필요했고, 새해 해돋이만큼 의미심장한 건 없으니까요. 의미와 상징은 허술하지만 그것과 포개지는 사람의 위안과 의지는 강합니다. 



그렇게 쭈-욱 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허망하고 덧없게 느껴질지라도 나의 의미가 닿는 것에 대해서는 용감해보이겠습니다, 성실해지겠습니다. 잘 해봅시다, 잘 부탁합니다. 2018년.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도 좋은 기운만 건네주길 바래봅니다. 우리가 쌓는 의미의 탑들을 어여쁘게 봐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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