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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Mar 31. 2017

3월- 정리

가볍고 작은 노트 한 권이 필요해 책장을 뒤졌습니다. 책꽂이에서 노트 몇 개를 빼내었습니다. 겨우 앞장 몇 장을 쓰다만 노트들이 너댓권이 있었습니다. 비닐포장조차 뜯지 않은 새 노트들도 많았지만 그것들은 그냥 놔두었습니다. 어쩐지 쓰다만 노트들은, 지금이 아니면 정리할 수 없을 것만 같은느낌이 들었습니다. 


작은 노트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습관은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일상의 소회부터 영화를 보고 난 뒤의 감상, 책에서 옮겨쓴 구절, 낙서까지 다양한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어떤장은 단어의 실루엣이 애매하여 앞 뒤 단어의 공백을 한참 생각해보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 문장이 있기도 하고, 어떤장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공들여 쓰여져 있기도 합니다. 그 속이 일관성 없이 제멋대로일수 있는 이유는, 순간의 나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 내려앉을 수 있는,안전하고 편안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노트는 겉면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고 다니며끝장까지 채웁니다. 그러나 몇 권은 도중에 동행을 멈추고 맙니다. 오래전 노트들이라 이유가 기억나진 않지만, ‘기록’이란 넓은목적 외에 다른 특별한 목적을 둔 노트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가령, 특정한 강의를 기록하거나 하나의 이슈에 대해 정리했거나 수신인이 있다거나의 식으로요. ‘나는 그다지 목적지향적인 사람이 아니구나’ 하며, 기록이 끝난 장을 씁쓸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채워지길 고대하는 것처럼, 하얀 백지가 눈을 반짝이고 있습니다. 


오늘정리한 과거는 어떤 사람을 위해 쓰여진 말들이었습니다. 이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더 이상 소용없어진 말들. 나는 그 말들을 써내려 갔던 어리고 아름답던마음만 곱게 걸러내 마음에 새기고, 장들은 모두 오려냈습니다. 가위로채 잘라내지 못한 종이는 칼로, 칼로 깨끗이 오려내지 못한 부분은 또 손으로. 그렇게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정리’된 부분은 그래도 흔적이 남았습니다. 이 흔적은 짧든 길든 한번 머물렀던무언가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는 것을 두고두고 상기시켜주겠지요. 오돌토돌 돌기처럼 남은 흔적은 유쾌하지도슬프지도 않아, 나는 어른처럼 웃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과거에 두는 일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기도 합니다.그땐 아무리 지난 과거를 현재로 끌어당기려고 애써도 소용없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과거를단정하게 쌓아가는 일에 능숙해진 것 같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시선도 한층 편안해졌습니다. 포기나 체념은 설명하는데 조금 어긋난 단어일 겁니다. 희망과 좌절을몇 차례 겪으면서 조금 성숙해지고 지혜로워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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