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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un 26. 2018

도서관을 좋아하세요?

그 곳에서 만나는 타인의 흔적들


 어릴 적 제 첫 별명은 ‘우생당 오리궁뎅이’었어요. 우생당은 제 고향인 서귀포 시내에서 당시 가장 큰 서점이었어요. 서점 주인과 친하셨던 부모님은 주말 나들이 코스로 꼭 우생당을 넣으셨고 한번 가서는 꽤 오래 머물러계셨죠.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았던 저는 낯도 안 가리고 책방을 휘젓고 다녔대요. 아장아장 걸을 때마다 기저귀로 볼록한 엉덩이가 실룩이는 뒷모습이 귀엽다고 손님들이 붙여줬다고 합니다. 사실 제 기억 속에는 없는 풍경이지만 분명 제 안에 책에 대한 애정은 그 때부터 시작된 거라고 생각해요. 유년기의 경험은 불분명하면서도 확실하게 사람 안에 새겨지게 되니까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가장 즐겨 찾는 장소가 도서관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걸으면 15분 거리의 작은 학생문화원 도서관이 저에겐 아지트나 다름없었어요. 부모님은 폭염과 추위를 피하는 곳으로 도서관만한 곳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죠. 그건 달콤한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설사 폭염과 추위 때문이 아니어도 정말 도서관만한 곳은 없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조용하고, 책이 있고,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서가에 꽂힌 책들을 넘겨보거나, 턱을 괴고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도서관에서의 시간은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지금은 모든 도서관이 전자화되었지만 제가 다닌 도서관은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도 도서대출카드 형식이었습니다. 책의 내지 맨 뒤에 누르스름한 북포켓이 부착되어 있고, 그 안에 끼워진 카드가 도서대출카드예요. 카드 상단에는 책의 기본 정보가 기재되어 있고, 그 밑에는 대출자의 이름과 날짜를 쓰는 칸이 있죠. 그 카드에 이름과 대여하는 날의 일자를 기록하고 도서관 데스크에 제출하면 책을 빌릴 수 있게 됩니다. 다 읽은 책을 반납하면 사서는 보관하고 있던 대출카드를 다시 포켓에 넣어 서가에 꽂아놓죠.  


요새는 찾기 힘든 도서대출카드 (출처:https://blog.naver.com/1to9/220843998586)


 대출카드는 그 책의 역사를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저는 카드에 적힌 이들의 이름과 필체를 보면서 어떤 사람이었을 지 상상해보는 일이 즐거웠어요. 왜 이 책을 그 때의 날짜에 빌렸을까,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금방 반납했던 사람은 책을 다 읽었을까, 유난히 오랫동안 이 책을 빌렸던 사람에겐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 이런 거요. 접었다 편 페이지 귀퉁이, 연필로 밑줄을 그어 논 문장들은 어떤 마음에서 남겨진 흔적일까 생각해보는 것도 좋았어요. 가끔 다른 책의 대출카드에서 보았던 낯익은 이름을 다른 카드에서 발견하면 저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데 남몰래 기쁘고 그랬답니다.  


 무인기계에 책의 바코드를 찍고 대출증으로 대여와 반납을 할 수 있는 지금의 방식은 훨씬 편리합니다. 그렇지만 가끔은 연필로 꾹꾹 눌러쓰던 대출카드가 그리워지곤 해요. 아날로그적 방식에 대한 향수는 아닙니다. 그 방식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마주침과 우연들이 그리운 거예요. 그래서 요즘에도 서점에서 새 책을 사기보다 도서관의 손 때 묻은 헌 책들을 먼저 집게 되는 것 같아요. 가끔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함부로 다뤄 망가진 책들도 있지만, 대부분 이후의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표식을 최소화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그 흔적들은 활자가 만드는 미로 안에서 헤맬 때 작은 위안이 되곤 한답니다. 누군가의 마음이 여기서 잠깐 머물렀다 갔구나, 하는요.  


도서관에서 빌린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에서 이런 쪽지를 발견했어요. 잠든 그와 그를 바라보며 쪽지를 남겼던 그녀의 알콩달콩한 역사의 흔적!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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