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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을 가지는 과정

2024 춘천마라톤 10k 준비 1

by 잡념주자

마음 내킬 때, 마음 내키는 곳으로, 마음 내키는 속도로 달리기만 해도 사실 즐거운 일이다. 혼자 뛰는 일이 그래서 편한 거다. 다만, 혼자 내키는 대로 달리다 보면 은근히 슬럼프도 자주 온다. 방향과 빠르기, 발구름 정도도 내 편할 대로 하면 되는 거지만 가끔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찾아오는 거다. 그럴 때면 달리기를 멈추고 다른 일-산행이나 보강운동을 해주면 좋겠지만 달리기에 집중한 마음은 움직임을 다른 것에 쉽게 내어 주지 않는다.

5월 초, 아이 학교에서 매월 가지는 반모임을 광명역에서 개최되는 달리기 대회 참가로 대체하기로 했다. 가족들이 다 같이 뛰는 거니 5킬로미터 가족런에 단체로 참가하자는. 막 발바닥과 아킬레스건 부상에서 회복하고 몸이 근질근질할 시기라 나만 10킬로미터에 나가볼까, 고민했지만 막 회복된 단계에서 부상이 덧나지 않을까 걱정도 됐고 한참을 계속될 가족들의 매서운 눈길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대회를 일주일 앞두고 집으로 참가 기념품이라는 게 도착했다. 파란색 티셔츠와 배번호, 대회 안내 리플릿과 광명동굴 티켓까지. 아, 지역 마라톤 대회 몇 군데만 다녀도 그해 운동할 때 입을 티셔츠는 다 마련하겠구나 하는 생각과 대회라는 긴장, 나는 얼마나 달릴 수 있을까 하는 설렘이 함께 찾아왔다. 그날 뭐 신지? 티셔츠는 그냥 이걸 입어야 하나? 그래도 대회인데 달릴 때 불편할 테니 렌즈를 맞춰야 하나? 물욕도 함께 샘처럼 솟아났다.

광명역으로 가던 대회날 아침, 길게 막혀있는 도로와 통제하던 경찰아저씨들을 보니 새삼 '내가 마라톤을?'이라는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5킬로미터라는 짤막한 거리가 목에 걸린 꽁치 가시처럼 걸렸지만 뭐 어떤가, 내 마음은 축제인 것을.

달리는 사람 많다, 마라톤 참가 어렵다, 말로만 들었지 그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 못 했다. 도착한 대회장에는 적어도 광명시 인구의 절반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함께 참가하기로 한 다른 가족들을 인파 속에서 만나 간신히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부모들은 알아서 달리기로 했다. 출발선으로 길게 줄을 지어 들어가던 순간, 집에서 화장실을 한번 더 다녀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행렬에서 잠깐 빠져나가기엔 다시 들어올 일이 걱정이고 막상 빠져나간다 해도 간이 화장실 앞, 건물 화장실 앞 길게 줄을 지은 저들 틈에서 어떻게 일을 치를 수 있을 것인가. 마음을 한번 더 부여잡고 그냥 달리기로 한다.

전국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 진행을 전속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닐까, 의구심이 드는 배동성 아저씨의 진행으로 하프코스, 10k 코스가 먼저 출발한다. 참 오랜만에 만나는 기분 좋은 긴장이 몸 전체를 고양시키는 느낌이다. 이제 5킬로미터 차례, 배동성 아저씨의 선창에 맞춰 카운트다운을 하고 레이스를 시작한다.

근데 이걸 레이스라 불러도 될까, 아니 이건 차라리 마라톤이 아니라고 하자. 사람들 속에 파묻혀 뛰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상태로 한참을 움직인다. 빈틈을 찾아 오락가락하며 달릴 곳을 찾는다. 빨리 달리지도 못하면서 우선 쭉 뻗은 곳으로 향한다. 그렇게 오르막을 오르고 터널로 들어간다. 유튜브에서 봤던 것처럼 터널에서 신나게 소리칠 준비를 하는데 저 앞 트럭 위에 디제이가 모든 소리를 잡아먹고 있었다. 그래, 내가 소리 지르는 것보다 남이 질러주는 게 낫지, 힘도 안 들고. 반환점을 지나 다시 오르막을 맞는다. 첫 오르막보다 훨씬 힘든 느낌이 든다. 멈춰서 걷는 사람들 때문에 치고 나가기도 쉽지 않다. 도로가 연석을 밟고 올라 달린다. 심박수는 한참 전에 170을 넘었다. 도착점을 보는데 스마트밴드가 이상하다. 내가 5킬로미터를 25분에 뛴다고? 들어가면 5킬로미터 기록이나마 PB다. 문득 주위를 보면 나 혼자 뛰고 있다. 그래 가족런이지. 가족런은 우리 가족 다 같이 들어가야 되는 거지. 그렇게 도착점을 앞두고 아내와 아이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한참이 지나 얼굴이 달아오른 아내와 기진맥진한 아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출발했던 그 자리로 모두 함께 도착했다.

도착한 아이가 에너지 음료를 마시고 갑자기 구토를 했다거나, 그 핑계로 그날 일정을 다른 가족보다 먼저 빠져나올 수 있었다거나 하는 건 사소한 이야기니 그만두자. 메달에 각인을 하지 못한 걸 아직까지 후회하고 있다는 것도 너무나 사소하니 여기까지만. 집으로 돌아와 다른 이들의 마라톤 도전기를 담은 유튜브를 보며 낮술을 오래 즐긴 것도 여기까지만.

마흔이 넘어서 어디에서든 성취를 느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일로써 만든 성취는 오롯이 내 것이 아니고 생활에서 일궈낼 수 있는 성취는 찾기 어렵고. 스마트폰 어플 속, 스마트밴드 속 동심원을 만드는 선들이 결국은 한 달 동안의 내가 오롯이 이뤄낸 것일 뿐이다. 과정에서 이 대회가 얼마나 큰 성취였을까. 심지어 온 가족이 함께 얻은 그 메달이 얼마나 스스로를 대견하게 만드는지. 언젠가 더 먼 거리를 달리고 싶은 욕심이 달리기가 힘겨운 날 끌어당긴다.

그래서 욕심을 밑천 삼아 한번 더 즐길 기회를 찾아본다. 내년도 동아마라톤과 올 가을의 춘천마라톤. 두 곳을 타깃으로 잡고 참가신청을 준비했다. 폭발하던 서버를 뚫고 두 대회 모두 10k 참가신청에 성공했다. 10월의 춘천마라톤을 준비하며, 또 그려질 동심원을 상상하고 메달 속 각인된 이름을 그리며 오늘도 주로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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