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춘천마라톤 10k 준비 2
몇 년 전부터 매해 10월 초에는 부산에 있게 된다. 5일 동안 있으며 영업용 미팅, 영화제 구경, 맛집 찾아다니기, 양껏 마시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먹고 마시는 광란의 며칠을 보내고 돌아올 제에는 늘어난 체중과 붓기에 대한 고민을 함께 안고 서울로 오게 된다. 서울에서도 딱히 절제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데 어째서 집만 나서면 먹고 마시는 일을 멈추지 못하겠는지.
작년 초여름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 부산에 내려가며 다짐한 것은 아무리 먹고 마시더라도 아침에 달리는 일을 멈추지는 말자, 는 거였다. 여전히 습관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그때 멈추면 다시 습관을 만드는데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는 걱정과 그때 간신히 만들어진 달리기 체력이 멈추는 순간 사라질 것 같다는 불안이 다짐 아래에 있었다. 그 걱정과 불안 덕에 전날 마신 술이 아직 위에도 남아 있는 것 같은 아침에도 숙소 피트니스 센터로 기어가 꾸역꾸역 달리기를 해냈다. 오히려 집에서보다 더 열심히 달리기를 한 모양인 듯, 돌아와 체중계에 오르니 출장 전보다 무게가 줄어있었다.
8월 초, 부산 출장이었다. 꽤 긴 시간 답이 안 나올 주제로 회의를 하고 1박 예정인 사람들끼리 저녁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동석해 있던 누군가 예기치 않게 어딘가에서 서로 마주쳤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만히 듣자 하니 내가 나가보고 싶었던 3월의 벚꽃 마라톤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때 10킬로미터를 뛰고 달리기에 재미를 붙였다는 누군가가 부산에서 열리던 마라톤 대회에 원정을 왔다가 지금 술자리에 있던 또 다른 누구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야기까지 왔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달리기와 관련된 것으로 옮겨 갔고 또 자연스럽게 내 직장 상사가 내 얘기를 했다. "우리 XX도 아침마다 달리기 하는데."
풀코스 마라톤도 몇 번씩이나 뛰었고 매일 아침 10킬로미터씩 달리고 출근한다는 OO팀장이 그 얘기에 반응한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소 상기된 표정의 그 양반은 기왕 이리된 것, 올해 10월의 출장길에는 다 함께 뛰어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본인이 동백섬부터 해운대로 이어지는, 일출이 굉장히 근사한 주로를 알고 있다고, 5시 반 무렵 뛰기 시작하면 가장 좋은 위치에서 해 뜨는 것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10킬로미터 내외의 단축마라톤 참가기와 러닝화는 뭐가 좋다더라 하는 이야기만 나누고 있던 나를 포함한 몇은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담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분명 10월 출장기간 술을 마실테고 술 마신 다음날 숙소부터 동백섬까지 이동하려면 늦어도 몇 시에는 일어나야 할지 그 짧은 시간 동안 계산이 되었다. 아무튼 모든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음 장소로 이동들을 했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해를 넘기며 겪은 가장 큰 변화는 야외에서 달리는 일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달릴 땐 아침에 깔짝 2~3킬로미터 정도만 야외에서 달리고 대부분의 달리기 마일리지는 아파트 헬스장 트레드밀 위에서 쌓았었다. 그렇게 계절을 보내고 다시 따스한 계절이 왔을 때 잘 달리고 싶다는 마음만큼 괴롭지 않게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 야외에서 달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때부터는 달리기 좋은 길, 볼거리가 많은 길을 찾아보았던 것 같다. 문득 생각나던 곳이 부산, 출장에 항상 머무는 해운대 해변이었다. 걷기 어려울 만큼의 인파로 항상 기피하던 곳이었는데 이른 아침에는 어떨까, 운이 좋으면 해 뜨는 걸 마주 보며 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8월 그때, 부산에서 만난 이들이 올해 10월에는 함께 뛰자고, 우리 나름의 러닝크루를 만들어 뛰자던 약속도 생각이 났다. 그래 지금쯤에는 모두 잊었겠지, 혼자서라도 뛰어보자. 추석이 지나고 출장을 준비하며 해운대 어디로 뛰면 좋을지, 한참을 살폈다. 해운대 백사장을 가로지르고 미포를 지나 해변열차길을 따라 송정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했다. 아, 뛸 수 있다면 거기다.
첫 아침, 약간 남은 취기와 함께 숙소문을 나섰다. 서늘하다 싶은 바닷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사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나 한참을 걸어 해운대 해변 광장에 도착했다. 막 떠오르려는 해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 속에서 수줍고 소심하게 몸을 풀고 평소의 페이스대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백사장을 뒤로하고 언덕길을 올라 블루라인파크로 올라섰다. 늦게 일어난 탓인지 해는 이미 떠버렸고 낯선 바다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뛰기 시작할 때는 기찻길 끝 송정까지 뛰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는데 가운데쯤인 청사포에서 문득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루 종일 만나야 할 사람들, 해야 될 일들이 생각나기도 했고 슬슬 지쳤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내일 또 오자, 출장은 며칠 더 남았으니.
이른 아침부터 미팅이 약속된 날이 있었고 비가 내린 날도 있었다. 작년처럼 숙소 피트니스 센터 트레드밀 위에서 텔레비전을 쳐다보며 뛰었다. 존 2 훈련이라는 생각을 해서인지 지겹지는 않았다. 다만 첫 아침, 더 길게 뛰어볼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룻밤이 지나면 돌아가는 날, 돌아가 써야 할 보고서 내용을 머리로 정리하는 척 멍하니 앉아 있을 때였다. '풀코스 마라톤도 몇 번씩이나 뛰었고 매일 아침 10킬로미터씩 달리고 출근한다는 OO팀장'이 말을 걸어왔다. "숙소가 △△이죠? 내일 다섯 시에 픽업하러 갑니다." 손을 저으며 아이고, 피곤하실 텐데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하려는데 근처에 있던 8월 술자리 참가자 두 사람이 눈을 번뜩인다. 둘은 어디서 픽업을 하겠다는 약속을 벌써 당한 모양새다. 어쩔 수가 없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인사를 건넬 도리밖에 없다. 그때부터 종일 일찍 일어나기 싫다, 내일은 달리기 싫다는 말을 버릇처럼 뱉으며 운동복을 입고 일찌감치 잠에 든다.
집에서 일어나듯 네시반쯤 깨어 나갈 채비를 한다. 에너지젤이라도 먹으면 좋으련만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하고 숙소문을 또 나선다. 이미 숙소 앞에는 그들이 와있었다.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 걸까, 표정 어딘가가 뚱해 보인다. 모임을 제안한 '풀코스 마라톤도 몇 번씩이나 뛰었고 매일 아침 10킬로미터씩 달리고 출근한다는 OO팀장'도 그랬다. 어제 일정이 밤늦게서야 끝이 났다고. 아유, 그럼 쉬셔도 되는데.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동백섬 공영 주차장에 도착해 각자가 몸을 풀기 시작한다. '모임을 제안한 풀코스 마라톤도 몇 번씩이나 뛰었고 매일 아침 10킬로미터씩 달리고 출근한다는 OO팀장'이 오합지졸로 보였는지 앞장서 스트레칭을 이끈다. 이렇게 한데 모여 준비운동을 해본 게 언제였더라, 아니 그냥 모여서 운동 같은 걸 해본 건. 살짝 땀이 날 정도가 되자 준비운동을 멈추고 달리기를 시작한다. 매일 달리는 나와 OO팀장을 제외하고는 행사처럼 간헐적으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내 기준으로도 평소 페이스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달리게 된다. 심박수는 안전하게 존 1~2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가끔 함께 뛰고 있는 사람들을 챙기는 여유도 부린다. 그렇게 뛰면 발목 나가는데, 고개를 숙여야지, 같은 잔소리들을 하며 그들 앞에서 페이스를 조절한다. 그 OO팀장도 앞과 뒤를 왔다 갔다 하며 사람들을 살핀다.
흐려서 해 뜨는 걸 보기는 텄다, 생각하고 저 멀리 바다를 본다. 맑은 아침 푸르게 반짝이던 바다도 좋았는데 짙은 구름 아래 낮게 일렁이는 바다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 약속한 3킬로미터 지난 지 한참 됐는데요, 뒤에서 실랑이를 한다. 그저께 멈추었던 청사포에서 다 같이 멈춰 음료수를 마신다. 10월 말에 있을 춘천마라톤 대회 걱정도 슬그머니 올라온다. 아 길게 달리는 연습을 더 해야 되는데. 걱정 뒤로 돌아가는 걸음을 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