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춘천마라톤 10k 준비 4
한 번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6월의 광명역 마라톤도 인파가 어마어마하다고 느꼈지만 그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좁으나마 몸을 움직일 공간을 찾아 천천히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한 주 전, 연습 삼아 뛴 10킬로미터 훈련에서 PB를 기록하고 춘천마라톤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좀 달라져버렸다. 미약하나마 한 시간 이내로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마음에서 스멀스멀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반대편에서는 너무 평지만 골라 뛴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춘천마라톤은 업힐 코스로 악명이 높은 대회, 처가를 다니며 자주 오가는 의암호 주변 도로, 송암레포츠타운 주변도로가 마라톤 코스라는 것을 알고 걱정은 곧 두려움으로 커졌다. 두려움은 이내 편안한 '포기'를 가져왔다. 내가 얼마나 뛰었다고, 아쉽지만 이번에도 펀 런 하고 다음 동아마라톤에서 기록을 내자, 안되면 공원사랑 마라톤도 있고.
편한 마음으로 쉬엄쉬엄 한 주를 보냈다. 다쳤던 발목과 발바닥이 걱정되기도 했고, 그 가파른 업힐을 뚫으려면 몸속에 에너지를 모아둬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풀 코스를 앞둔 사람들처럼 몸에 글리코겐을 쌓는 카보로딩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평소보다 탄수화물 섭취에 더 신경을 많이 쓰기도 했다. 그래봐야 밥 한술 더 뜨고 파스타 해 먹는 게 다였지만.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의 긴장, 얼마나 뛸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는 내 달리기에 대한 기대로 한 주를 보냈다.
대회 하루 전, 아내의 일 때문에 파주 지혜의 숲에서 하루를 보냈다. 간만에 책에 둘러싸여 있는 기분도 좋았고 정말 오랜만에 손에 쥔 소설이 몸과 마음의 뻑뻑함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파주에서 춘천까지 길게 운전해야 하는 일이 걱정됐지만 그만큼의 피로는 있어야 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춘천에 도착해 미처 챙기지 못한 비닐우비를 사기 위해 돌아다니고 처가에 짐을 풀었다. 장인어른과 잭다니엘 한잔,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열한 시쯤, 잠을 청하려 누웠다.
잠이 안 온다. 긴장될 일도 없고 낮잠을 잤다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잠이 안 온다. 좌우로 뒤척이는 와중에 걱정과 기대가 동시에 찾아온다. 잠깐 잠이 찾아오는데 주로위의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 빠르게 뛰어간다. 손목 위 워치 속 시간은 평소보다 빨리 흐르고 심박수는 190이 넘어가 있다. 살짝 실눈을 뜨니 아직 어둡다. 더 자자. 핸드폰을 보니 다섯 시가 지나가 있다. 나 같은 사람들이 있을까, 습관처럼 눈팅하는 커뮤니티를 들여다본다. 여섯 시가 지나고 천천히 밝아올 무렵, 대회장으로 갈 채비를 시작한다.
스타트 지점인 공지천교 앞부터 이미 차와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무리지은 사람들에 섞여 대회장으로 향한다. 맡겨야 할 짐이 없으니 편하게 몸 풀 장소부터 찾는다. 사람들을 지나 공지천 옆 좁은 산책로에서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목표한 시간대도, 정해둔 페이스도 없어서 그냥 평소대로 몸을 덥혔다. 아내와 재잘거리며 1킬로미터쯤 가볍게 달리자 비닐우비에 습기가 차오른다. 몸과 마음도 같이 데워져 녹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달리는 건지 도착하고도 두 시간이 한참 넘어서야 겨우 스타트라인에 자리를 잡는다. 마음속으로는 가볍게, 즐겁게, 천천히를 되뇐다. 6월에 만난 배동성 아저씨의 구령과 함께 내가 서있던 D조가 출발한다. 천천히 뛰어나가지만 이내 사람들 속에 갇힌다. 옆에서 뛰던 아내와 떨어져 달리기 시작한다. 첫 오르막을 넘고 평평한 주로를 달린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파이팅 소리에 같이 소리를 질러볼까 했지만, 그보다는 호흡을 챙기기로 한다. 3킬로미터쯤 지났는데 벌써 지친 사람들이 있나 보다.
- 여기서 걸으면 끝까지 걸어야 해.
소리가 들린다. 맞다. 힘들어 걷기 시작하면 다시 뛰는 데엔 더 많은 에너지와 결심이 필요하다. 느리게라도 뛰어야지.
다시 내 발구름에 집중한다. 삼악산케이블카 터미널을 지나자마자 또 오르막이 시작된다. 첫 오르막은 차라리 가벼웠다. 걷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그들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방향을 틀고, 앞지르고 정신이 없다. 고개를 처박고 앞사람 발을 보며 보폭을 더 잘게 뛴다. 오르막을 지나 송암레포츠타운까지 내리막에서 조금 속도를 낸다. 시계를 슬쩍 보니 아직 25분이 지나지 않았다. 발을 더 세차게 구른다. 저 앞 급수대가 있다. 유튜브에서 본 것처럼 멋있게 마시고 싶었는데 그것도 연습이 필요한지 절반은 흘려버렸다. 물을 마시고 나니 또 오르막이다. 이번엔 더 길고 가파르다. 반환점을 지난다.
앞에서 뛰는 사람을 쫓아간다. 앞지르지는 못하더라도 간격은 유지하자, 마음을 먹고 발을 구른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앞지르게 되는 사람도 있고 놓쳐버리는 사람도 있다. 강원체고로 향하는 오르막을 만난다. 몸 전체에서 열이 오른 게 느껴진다. 턱을 당기고 고개를 들지 않으려고 애를 써본다. 고개에서 내려오니 응원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를 응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괜히 손을 들어본다. 다시 내 앞사람을 쫓아 뛴다. 이번에는 따라잡고 싶다. 앞지르고 싶다. 더 빨리 뛰고 싶다.
8킬로미터 표지판을 지나친다. 손목을 올려 워치를 확인하면 45분이 지나있다. 심박수는 180을 넘어서있는데 또 오르막이다. 아, 더 못 뛸 것 같다. 더 빠르게는 못 뛸 것 같다. 저기 앞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이
- 업힐 끝입니다! 다 왔어요!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손목을 올린다. 50분이 지나있다. 어쩌면 한 시간 안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내리막에 접어서자 저기 결승점이 보인다. 다 왔다, 다 왔다. 고관절이 살짝 아픈데 아직 발을 구를 수는 있는 것 같다. 저 멀리 사회자가 혼잡하니 너무 세게 스퍼트 하지 말라,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살짝 발구름을 줄이고 결승점을 통과한다. 워치에서 알림이 온다. 완주했음을, 그리고 레이스 기록을 알리는 문자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