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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린치

< David Lynch ; 추상. 컬트 영화. 아트 라이프 >

by 심재훈


예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겠지만 나는 데이빗 린치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는 천재적인 영화감독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추상미술의 대가처럼 보인다. 그는 실제로 미술을 공부한 적이 있다. 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를 통해서 처음 그를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영화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형용할 수 없는 시네마적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느냐 이지 않을까. 영화는 사람의 사고와 영혼의 모습을 탈바꿈시킨다. 영화는 영혼의 얼굴에 난 생채기를 치료해주고 말끔하게 복구시킨다. 린치는 소위 말해서 영화에 비주류적인 감정을 집어넣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감정들을 관객들이 경험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미 세상에서 여러 감정들을 겪어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우주에는 우리가 아직 느껴보지 못한 신비한 감정들이 난잡하게 도사리고 있다.




《인랜드 엠파이어》(2006)를 보면서 공포라는 감정에도 신비한 기운이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신비한 공포는 주눅 들어 있었던 나의 마음에 따스함을 전달해주었다. 확실한 건 영화를 감상함으로 우리는 영혼의 치유를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못내 확신해왔던 사고의 편견들이 깨지고 영혼은 새로운 걸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그리고 억눌려 있던 지성(知性)의 영역이 비로소 해방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다.




물론 이러한 영화적인 감정이 종교적 감화(感化)와 꼭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분명 관객들에게 인생의 새로운 지침을 제공해준다. 린치의 영화는 더더욱 그렇다. 꿈과 무의식의 영역을 묘사하면서 결국 삶의 비밀은 우리의 의식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무의식과 소통하면서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짜릿함을 느낀다. 그 무의식과의 소통을 통해서 얻은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관한 어수룩한 직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린치는 그의 영화를 통해서 관객들이 새로운 진실과 감정들을 경험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광란의 사랑》(1990)은 매몰된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린치는 영화에서 추상과 상징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인생의 해답이 거기에 있다고 암시해준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태도는 어쩌면 무책임하고 관조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절히 객관적인 시각을 갖춘다면 린치의 영화들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한다. 결국 인생이란 무수한 개념과 상징들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나. 사실 린치의 영화들은 모두 불친절하다.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되어가고 있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영화의 난해성 또한 그의 영화적 개성이 되어버렸다. 장면과 장면의 연속. 느낌과 느낌의 연속. 상징과 상징의 연결. 나는 유독 힘껏 힘을 준 것 같은 그의 흰머리가 멋있어 보인다. 자신이 컬트 무비의 제왕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도 컬트적인 주제들과 함께 고속도로를 내달리고 싶다.


인생에서 한 번쯤은 《트윈 픽스》(Twin Peaks)의 세계에 빠져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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