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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재훈 Jun 23. 2021

인터네셔널 익스피리언스

카투사 이야기 - 1

 이건 벌써 오래된 이야기이다. 6~7년 정도 되었을라나.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지만 그 시간들은 내게 아주 특별한 기억이다. 모르겠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외국에 대한 동경 비슷한 게 아주 강했던 것 같다. ‘강하다’라는 형용사가 아주 적확한 것 같진 않다. 냉면에 농도 있는 식초를 뿌려 맛을 내는 것처럼 이 동경은 아주 짙으면서도 한 번 몸에 배면 지워지지 않는, 그런 본능과도 같다. 굳이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보자면 어떤 직관(intuition)이나 감각(sense) 같은 거다.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요청한다면 솔직히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 ‘럭셔리’라는 영단어를 붙여본다면 조금 도움이 될 듯싶다. 내 이 동경 … 본능 … 감각 …, 은 소위 말해 ‘사치’의 일종이다. 새로운 걸 경험해보고 싶은 욕구. 그 욕구가 내 장기들을 뚫고 거슬러 올라와 자꾸 내 마음을 자극하고 부추기는 거다. 한국 땅에서 사는 걸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다. 그저 내게는 한국 땅이 좁아보였고 얼른 이 곳을 나와 신세계를 마주하고 싶었다. 이십 대까지만 하더라도 아메리카와 유럽은 내 선망의 대상이었다. 주변에서는 시대가 변하고 있다면서 이제 아시아가 서구문명을 추월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들이 꽤 들렸다. 중국의 부상을 봐라, 이제 미국도 별거 아니다 라고 말하는 정치 서적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곤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시대는 계속 변하고 있지만 서구 문명이 우리에게 전하는 파급력 자체는 여전하다고 믿었다. 유럽이 그리고 미국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 그 조류와 리듬은 예전처럼 그대로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국제정치의 흐름은 겉으론 보이진 않지만 우리 인생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나는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흐름이 무에 그리 중요하냐고 묻기도 한다. 자기 인생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세상인데 그런 것 까지 스트레스 받아가며 신경 쓸 필요가 있냐고 … 묻는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비판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인생은 각자 알아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래라 저래라 강요할 수 없다고 본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인생의 리듬이 있다. 각자 자기 인생에 만족하며 살아가면 그만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국제정치의 흐름을 읽어내야 하며, 또 그런 분석놀이를 즐기는 부류도 있다. 코인과 주식. 하물며 이런 것에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흐름을 읽어내는 건 매우 중요하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나는 유럽 문명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건재하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그들이 아무리 타락하고 뒤쳐진다고 해도 우리보단 낫겠지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유럽과 아메리카를 향한 나의 이런 동경은 종종 맹신으로 변질되곤 했다. 유럽 제국주의가 한창 만연했을 때 유럽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들을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믿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오리엔탈리즘이다. 유럽 사람들은 아시아인들을 자신들의 변종 혹은 다른 세계에 사는 신비한 존재로 보았다고 한다. 이런 거대한 흐름이 인간의 후손이라는 작디작은 나 같은 존재를 완벽하게 잠식시킨 탓인지 나는 항상 나중에 이 좁은 땅을 벗어나 더 큰 세상으로 건너갈 거라는 다짐 아닌 다짐을 했었다. 


 카투사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내 국제적인 감각을 충족시키고 하나의 사치 행위를 부릴 수 있을만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어렸을 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무언가에 싫증을 내고 지루해하는지 잘 몰랐다. 나는 주변에서 하라는 대로 살았다. 매우 순종적이었다. 딱 정해진 룰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일탈과 탈선을 잘 해보지 못해본 나로서는 어떤 규칙과 루틴을 깨는 건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고 한 살씩 먹어가면서 나라는 인간의 성질이 제도에 묶여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조금씩 자각하기 시작했다. 아직 서른뿐이 되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묻는다면 … 더 할 말이 없다. 저리 꺼져 버려! 이십 대 후반에 영화 회사에서 반 년 간 일 한 게 조직 생활의 전부였지만 난 단연코 그런 생활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회사생활을 하는 건 어떻게 보면 극한직업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래서 때로는 직장인으로 몇 십 년을 근속한 우리 아버지가 존경스럽게 보인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기계처럼 출근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것도 발 딛을 틈 없는 아침 시간대 버스와 지하철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 숨이 턱턱 막힌다. 나는 새로운 걸 꾸준히 보지 않으면 금세 무기력해지고 인생에 끔찍한 회의주의자가 되고 만다. 일부러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자 하기 보다는 내 DNA에 그렇게 인식되어 있는 기분이다. 누군가 잔소리해서 더 잘하는 타입이 아니기에. 나는 내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고, 스스로 떠올린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는, 그런 소심하면서도 고집 있는 독립성 강한 인간이었다. 


 군대로 카투사를 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대학교 1학년 때서였다. 주한미군들과 함께 생활하고 일하는 거 자체가 뭔가 조금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생활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아까도 말했지만 일종의 사치처럼 보였다. 갓 스무 살이었던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뚜렷한 정치적 입장 같은 게 없는, 곱디고운 흰 도화지 같은 상태였다. 주한미군과 같이 일한다는 게 뭐 어떤 정치적 색깔을 덧입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미국에 호의적인 감정 없이는 그들과 잘 어울리기 힘들다. 기본적으로 카투사로 입대 신청을 한다는 건 그래도 미국문화를 극단적으로 혐오하진 않는다는 걸 의미하지 않을까.(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물론 대부분의 남자들은 카투사의 소문난 편한 생활을 꿈꾸면서 입대신청을 한다.(이건 진리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전쟁이 남한의 북침으로 발발했다고 믿는 극좌파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싫어서라도 카투사 제도가 하루빨리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까? 한 번 상상해보았다. 카투사로 지내면서 정말 극혐인 미군 장교와 상사들도 있지만 거기엔 정말 한국을 사랑하고 카투사와 잘 지내고 싶어 하는 미군들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카투사들은 전역할 시기가 다가오면 나쁜 추억보다는 좋은 추억을 더 많이 가지고 사회로 나가는 것 같다.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카투사 제도는 역사적으로 보수주의 울타리 가운데 정착해 있고 카투사들은 나중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조금 더 좋은 쪽으로 바라보려는 성향이 더 강해져서 나오게 된다. 물론 모든 카투사들이 나처럼 생각하는 건 아닐 거다.   


 미군은 모병제를 따르고 있고 여기 한국에 온 미군들도 모두 자신들이 군인이라는 직업을 직접 선택한 것이다. 아마 다른 나라가 아닌 한국으로 오게 된 건 반강제적인 것처럼 보였다. 한국에 오기 전 독일이나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던 군인들도 꽤 많다. 참고로 그들은 주한 미군 기지가 가장 썩(suck)하다고 말한다. 잇 썩쓰!(It sucks) 독일 같은 데는 밤에 통금도 없고 외출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데 한국은 밤 열시만 되면 기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고 불평한다. 그 쉬운 외출도 일일이 기록하고 나가야 한다고. 외박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건 인과응보이다. 한때 용산 기지에 있던 미군들이 숙대 근처에서 여러 사고를 일으켜서 파문이 돌았었다. 매춘이나 구타, 폭행 사고가 계속 일어나면서 주한미군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아지기도 했다. 이 놈들 대부분이 밖에서 술 취해서 벌인 짓이었다. 그러니 통금이 생길 수밖에. 그래서 내가 있던 동두천 부대에서는 카투사와 동행하면 2박 3일 외박이 허락되는 경우가 있었다. 미군 장교들도 여기 카투사들이 대부분 똑똑하고 인품이 괜찮다는 걸 다 알고 있다. 미군보다 카투사를 더 믿고 좋아하는 상사, 장교들도 있으니 말 다했지 뭔가. 


 일단 카투사로 들어오면 시야가 조금 넓어져서 나오는 것 같다. 아무래도 영어권 문화를 제일 가까운 데서 직접 경험하고 살아내다 보니, A형이 O형 피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과도기 과정을 맞게 된다. 이때가 바로 국제적인 감각을 살릴 타이밍인데 여기서 바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마음을 여는 부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로 나뉘게 된다. 영어 실력이 느는 것도 여기서 판가름이 나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카투사가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알다시피 여기 생활은 일반 한국군과 비교가 불가한 전혀 다른 종류의 세계이다. 나는 여기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매우 소중하게 느껴졌다. 어학연수도 유학도 다녀오지 못했지만 국내에서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귀중한가. 나는 이것이 남들이 쉽게 접해볼 수 없는, 아주 극도로 희귀한 종류의 삶이라 확신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이 그 세계로 빠져들었다. 왜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가 몰랐던 몽환적인 세계에 빠질 때가 있지 않나. 


 뱀처럼 기다란 복도에 양 옆으로는 수많은 방들이 연이어 배열되어 있는 구조. 그리고 그 문들을 천천히 하나씩 열어보는 거다. 방마다 서로 다른 세계들이 펼쳐진다. 마치 인간의 뇌를 해부해놓은 것 같기도 한 이 세계 속에 카투사라는 방은 아주 특별한 기억을 채운 또 다른 고유한 세계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수많은 기억들이 무수한 서랍 칸에 아주 정갈하게 채워져 있는 것처럼. 카투사로 지내는 시간도 이 서랍의 일부처럼 내 기억 어딘가를 가득히 채워줄 무언가였다. 그리고 이 서랍장은 내 자신이자 나의 정체성을 증명해줄 특별한 소품이다. 내 국제적인 감각은 앞으로도 그 서랍장을 계속 가꾸고 꾸며나갈 게 확실하다. 영어 … 캄보디아 … 발리 … 하와이 … 런던 … 마닐라 … 난 지금까지 이런 이정표를 붙여왔고 그렇게 내 감각을 가꿔왔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또 다른 이름들을 적어 내려가지 않을까. 더블린 … 홋카이도 … 노르웨이 … 헬싱키 … 프레키스톨렌 … 요즘엔 왜 그렇게 북유럽 나라들을 살피는지 모르겠다. 그 끝없는 설원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탓일까. 아니면 내가 북유럽 신화를 너무 좋아해서 그러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 곳에 아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있다고 믿는 탓일까. 카투사라는 기억도 이런 수많은 동경 리스트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카투사가 되었고 그걸 몸소 경험해본 거다. 난 미래에도 이렇게 희귀한 걸 느끼고 맛보고 싶다. 남들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들 말이다.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다. 이런 본능이야말로 내 안에 꿈틀대는 국제적인 감각 아닐까. 영어로 좀 더 풀어 말하자면 <인터네서녈 익스피리언스>. 어쩌면 지금 내가 카투사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도 내 안에 이 감각이 나를 통째로 집어삼켜서 그런 건 아닐까. 어쨌든 이렇게 감각에 이끌리는 인생이 지루하진 않다. 더군다나 꽤 재밌다. 시간이 지나 내게 상고해볼만한 테마들을 꽤나 많이 던져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 감각에 내 인생을 던져볼 참이다. 그리고 이 희귀한 감각과 경험들을 전승설화처럼 남들에게 풀어 전하고 싶다. 내가 너무 잘난 체 하고 있는 걸까.



* 이 작품은 2021 박경리 토지문화재단 문인 창작실 입주작가로 선정되어 활동하는 동안 집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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