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투사 이야기 - 2
새벽 4시 30분, 조금 있으면 1호선 열차가 지나간다.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인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의정부 공기가 더 맑아서 일지도 모른다. 방금 막 논산에서 5주 훈련을 마쳤는데 여기서 또 다른 한 달을 보내야 한다. 생전 처음 보는 미군 교관들이 늦은 밤에 미국식 도시락을 우리에게 나누어 준다. 솔직히 한국군에서 주는 밥보다 훨씬 맛있다. 기내식 식단처럼 짜고 단 것들이 많다. 우리는 모두 빡빡머리다. 희끗한 아기동자들이 한데 모여 식사를 시작한다. 낯선 환경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건 바로 먹을거리이다. 단숨에 해치웠다. 우리는 아미(Army)라고 써져있는 회색 자켓을 겉에 입는다. 아래는 검은 반바지이다. 처음 입어보는 미군 운동 유니폼이다.
미군 장교들이 빠른 속도로 씨 부리는데 나는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국내파였다. 축구 국가대표팀도 알게 모르게 해외파와 국내파로 나뉘는 것처럼 여기도 유학파 도련님들이 아주 근사하게 먼저 교관의 말을 알아듣고 대답한다. 그런 팬시함에 나는 조금 주눅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도련님들이 부럽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 그들처럼 저런 팬시함을 장착하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교관들은 쉿(shit), 퍽(fuck)을 입에 달고 산다. 이 아기동자들의 기를 초반부터 잡겠다는 의지가 역력하다. KTA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한 바퀴를 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는 매주 피지컬 테스트를 받는다. 푸시 업, 싯 업, 투 마일 런. 이 세 가지를 본다.
나는 논산에서 투 마일 런을 거의 1등 하다시피 했다. 그때도 유학파였던 욱이가 나와 1, 2등을 다투었는데 KTA에서는 내가 지고 말았다. 욱이는 논산에서와 달리 내 뒤에 꼼짝없이 붙어 있다가 막판에 나를 추월하는 전략을 짰다. 나는 그야말로 공짜로 페이스메이커 노릇을 한 거다. 1, 2등을 놓친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지만 어찌 보니 그건 일종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유학파 새끼들은 영어도 잘하고 운동도 잘한다. 그나마 운동으로는 국내파에선 내가 대표선수였고 그건 어떤 국위선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논산에서도 카투사는 따로 훈련을 받는다. 나는 아주 눈치 없이 자발적으로 분대장훈련병을 하겠노라고 선언했고 같은 분대원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킥킥 웃어댔다. 그들은 나를 ‘분’이라고 불렀다. 11명 중에 5명이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친구들이었다. 노스웨스턴 두 명 UCLA 한 명 브라운 한 명 … 나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밖에도 밖으로 돌아다니다 보면 아이비리그 친구들이 꽤 있었다. 콜롬비아에 다니는 친구가 있는데 듣기로는 한 학기 등록금이 삼천 사천이라는데. 절친 준이가 중국 성조를 구사하듯이 부산 사투리로 다시 씨 부린다. 하여튼 여기는 클래스가 있는 집단이었다. 다른 친구들도 SKY 출신들이 허다했다.
투 마일 런, 싯 업 모두 일등인데 푸시 업이 안 되는 이유를 몰랐다. 축구를 좋아했던 나는 비교적 상체보다 하체가 튼실했다. 우리가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때 식당에서 오 분 컷 하라고 각종 컬스를 쏟아내던 교관들은 몇 주 지나니 더 이상 예전처럼 사납게 굴지 않았다. 그렇게 4주가 흘러간다. 세컨드 리터넌트 … 퍼스트 리터넌트 … 캡틴 … 메이저 … 커널 … 이제는 한국인 교관이 우리에게 미군 장교 계급 체계를 외우게 한다.
“하 와유 두잉 썰?”
장교들에게는 이렇게 인사해야 한다. 그리고 직무 명칭을 외운다. 서플라이 … 채플린 어시스턴트 … 처음 보는 단어들이 줄줄이 나온다. 그래도 이 클래스마저 아주 특별한 사람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자부심이 생겼다. 생전 몰랐던 바버 샵에 들어가 돌격형 머리를 만든다. - 이건 한국군 머리와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 옆과 뒤를 완전히 삭발한 뒤에 위쪽과 앞만 남기는 습법은 미군들을 따라한 것처럼 보인다. - 미군 교관들은 구보를 하면서 이상한 군가를 외운다. 그건 마치 데이빗 보위의 노래처럼 흥이 나면서도 누군가를 조롱하는 것 같다. 「스페이스 오디티」 가사에 등장하는 ‘메이저 톰’처럼 ‘잭’, ‘매튜’와 같은 고유명사들이 튀어나온다. 우리들은 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를 대충 입으로 때운다. 미군 부대에는 참 이상한 이름들이 많다. KTA는 또 다르게 캠프 잭슨이라고 불린다. 대부분 한국전쟁 때 큰 업적을 남긴 군인들의 이름을 따서 만든다고 한다. 의정부에는 또 다른 미군 기지가 있는데 그게 바로 캠프 레드 클라우드이다.(지금은 모든 부대가 평택으로 옮기면서 사라진 유령부대가 되었지만 …) 내가 나중에 들어가게 된 동두천 기지는 미 2사단 소속이었고 캠프 케이시와 캠프 호비가 있었다. 카투사의 꿈, 용투사(용산에서 근무하는 카투사)는 캠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용산 베이스라고 불렀었나 … KTA에서 4주 훈련이 끝나면 각자 자대 배치 받은 곳으로 건너간다. 대구, 오산, 평택 … 어딜 가든 나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었다.
동두천 기지는 가장 외지라고 혹평 받는 곳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별로 운이 없었다. KTA 마지막 주에 카투사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직무를 1순위 2순위 3순위 식으로 적어낸다. 모두들 용투사 행정병이 되기를 꿈꾼다. 누구든 동두천 전투병이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시절엔 난 신을 만났다고 꽤 흥분해 있던 시기였다. 그 투철한 신앙심은 군 생활을 하면서 겪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었다. 나는 장남이었고 입대할 즈음에 우리 집안 분위기는 그리 썩 좋지 못했다. 부모님은 서로 갈등을 겪고 있었고 장남 입장에서 그런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할 자식은 없을 것이다. 그건 내가 절대 반길 수 없는 꽤 고질적인 문제였다. 솔직히 나는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군 생활을 마쳤던 것 같다. 과거에 아무 일 없이 자연스레 지나갔던 순간들도 어쩌면 엄청난 위기가 될 뻔한 극적인 요소를 항상 품고 있지 않나. 나는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하면서 깊은 안도감을 누린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그 당시에 나는 1순위로 군종병(채플린 어시스턴트)을 썼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신에게 이렇게 기도했다. 조금 편한데도 있겠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 가겠노라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다.(이건 순전히 가정이다) 추첨 프로그램은 돌아갔고 나는 그렇게 동두천에 똑하니 떨어졌다. 그것도 가장 외지인 캠프 호비였다. 부대명은 1-15 포병대대. 나는 군종병으로 거기로 가게 되었다. 논산에서 같은 분대원이었던 최는 대구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최는 심슨을 닮았다. 큰 눈에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두꺼운 입술. 영락없는 심슨이었다. “건강히 잘 지내고” 심슨은 KTA 마지막 날 나에게 그렇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미군기지 안에 식당은 두 가지 길이 있다. 식사를 빨리 해치우고 싶다면 숏 컷으로 가면 된다. 반대로 조금 시간이 드는 식단(조금 퀄리티가 있는 음식)을 원한다면 롱 컷으로 가면 된다. 보통 숏 컷엔 햄버거나 핫도그 같은 패스트푸드가 가득하다. 매일 그걸 먹을 순 없다. 옆에 급식당번으로 서 있는 카투사 한 명이 아주 일정한 리듬을 따라 이렇게 외친다. “원 스쿱 앤 고” - (One scoop and go!), 한 숟갈만 뜨고 꺼져! - 조금 더 먹고 싶어 지체하는 순간 그 소리가 번개처럼 떨어진다. 우리는 그렇게 기계처럼 움직인다. 물론 이것도 4주 만 참으면 된다. 자대로 배치되는 순간부터 모든 건 자유로워진다. 3주차 때 가족들이 의정부에 찾아올 수 있도록 미리 통지를 해준다. 오랜만에 본 엄마 얼굴이 더 야위어진 것 같았다. 난 그 속사정까지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내가 카투사인 게 자랑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의정부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논산 분대원이었던 열 명과 더 친했었다. 그들은 여전히 나를 ‘분’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논산 마지막 주에 서로 눈물을 흘렸다. 아니, 나 혼자 울었던 것 같다. 나는 딱히 리더십이 있는 편이 아니었고 분대장 훈련병이라는 직책은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었다. 우리는 어울렁 더울렁 모여서 서로 어깨동무를 했고 욱이와 K는 나를 위로했다. 특히 K는 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고 분위기 메이커였다. K 옆에 있으면 항상 재밌었다.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건 아니었는데 주변에 너무 많은 여자 사람 친구(여사친)가 있었다는 점과 그 나이 대에 벌써 이뤄놓은 게 너무 많았다는 게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지도록 작용하곤 했다. K는 목사 아들이었지만 가족에게 그리 큰 기대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니체가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를 증오하고 완벽한 무신론자로 돌아섰던 것처럼 K도 그에 버금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왠지 그 안에 숨겨진 작은 불씨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작은 불씨는 점점 커져갈 운명이었다. 그래서 K는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세상을 향해 더 강하게 돌진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실제로 K는 UCLA를 다녔었고 마케팅 쪽으론 벌써 여러 회사를 입사한 경력이 있었다. 뛰어난 언변과 엄청난 친화력으로 생판 모르는 누군가에게 호감을 얻곤 했다. 그런 재주만 보자면 원체 나와 수준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는 조금 외로워보였다. K의 그런 고독이 내게는 또 다른 동정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우리는 더 가까워질 수도 없지만 더 멀어질 수도 없는 사이가 됐다. 그는 항상 내 축구실력을 치켜세워줬다. 그리고 K와 함께 같은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에도 난 그가 싫기보단 오히려 좋았다. K가 품고 있는 고독이 내 것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향한 상처. 나는 그런 동질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런 상처받은 영혼들이 내 주변에는 꽤 있었다. KTA에서 우리는 3인 1실로 방을 썼다. 그땐 어떻게 그랬나 싶지만 나는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신우회 비슷한 걸 조직했다. 주일에 항상 교회를 가던 놈들이 이곳에선 예배를 드릴 수 없으니 그런 걸 만들었던 거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서로 성경을 읽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고백하기도 했다. 세현이는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였다. 세현이도 K와 마찬가지로 아주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는데 가족들의 그런 맹목적인 믿음생활에 적당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나 서질 않아”
어느 불침번 날 세현이는 나에게 이런 처절한 고백을 했다. 종교의 맹목성 반대편에 서서 치열하게 저항하던 그는 그렇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 세현이는 그 이유 없는 도주를 계속 해왔던 거다. 믿지 않으면 안 되기에 믿었고 그렇게 인간의 신념이라는 끝자락에서 신을 증오하기로 결단했던 거다. 말은 안 했지만 세현이는 내가 편했었나 보다. 나도 말은 안 했지만 그가 편했다. 나는 오히려 세현이의 부모가 더 미워졌다. 사랑이 없는 종교. 겉만 번지르르한 바리새파. 먹이연쇄처럼 우린 그렇게 다른 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잔재들을 온 몸으로 받아내어야 했으며 신음해야 했고,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그 영적 난제를 고독히 돌파해야만 했다. 부모의 저주가 우리에게까지 머물기 시작했던 거다.
난 세현이의 고해를 잊을 수 없었다. 세상은 마음의 전쟁이었다. 우린 남이 알아주지 않는 고뇌를 정면으로 부딪쳐야 했다. 이 믿음의 저주가 우리 대에서 끊기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여자의 벗은 몸을 앞에 두고 남자의 정기를 마음껏 펼쳐낼 수 없다는 저주. 세현이는 그렇게 고백했다. 여자와 DVD 가게에 갔지만 실패했던 경험담. 그것은 한 편의 스릴러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묵묵히 그를 위로했다. 새벽 4시. 곧 새벽 PT가 있을 참이었고 우리는 한 잠도 자지 못하고 그렇게 부랴부랴 환복하고 찬바람을 맞았다. “업!” “다아아운” “업” “다아아운”. 다리가 올라갈 땐 쉬웠는데 천천히 내려갈 땐 복부의 온 창자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등과 통수는 찬 시멘트 바닥을 등지고 있다. 미군 교관은 일부러 다운을 더 길게 늘어뜨린다. 그래서 우리가 더 괴로우라고. 그들에게 우리의 신음소리는 더 없는 기쁨이니까. 별은 초롱초롱 눈을 밝힌다. 서울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라도 이 순간만큼은 더 없이 반갑다. 별들은 우리에게 아침인사를 한다. 그리고 이윽고 열차가 지나간다. 새벽 5시를 조금 넘기자 1호선 열차가 요란을 떤다. 멀리서도 텅 빈 자리들이 속속들이 비친다. 가끔씩 친근한 두상이 두더지 게임처럼 불쑥 나타난다. 이 시간에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 걸까. 그들이 부러웠다. 남자의 인생은 뭘까. 인생은 어디로부터 나서 어디로 가는 걸까. 오마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 두상들이 예쁜 새내기 여대생이기를 마음으로 바랬다. 여기서 들었던 온갖 음담패설이 떠올랐다. 이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그리고 저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내려가고 싶었다. 여자를 품고 싶은 마음, 그리고 안락한 곳에서 친구들과 노닥거리고 싶은 마음. 그런 것들이 한데 모여 내 안에 하나의 이상향을 그려 나갔다. 발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두 개의 끝이 공중에서 한참 머물렀다. 열차에 탄 여자여! 나를 데려가라! 내가 그대를 소유하리라! 아니, 당신이 나를 가져도 아무 말 하지 않을 테니! 그런데 열차는 나지막하게 이렇게 나에게 말했다. “캠프 잭슨, 안녕!”
* 이 작품은 2021 박경리 토지문화재단 문인창작실 입주작가로 선정되어 활동하는 동안 집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