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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완)

하나은행배 슈퍼매치 4강전 - 박정환 VS 신민준 (10) - [完]

by 이연

바둑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면 대부분 참 재미가 없다. 임전소감을 물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대가 강하기 때문에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같은 식으로 밑밥을 깔지를 않나, 끝나고 나서 물었을 때도 "운이 좋았습니다." "상대의 실수 덕에 이겼습니다." "다음 경기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이런 뻔한 말만 반복한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원래 승부는 친구랑 음료수 걸고 가위바위보 할 때도 진심을 다하는 거다. 상대가 만만찮아? 상대도 강하니까 프로를 달고 있는 거지. 애초에 만만한 녀석이었으면 너랑 붙을 수도 없었을 테지. 매번 운이 좋았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운이 좋다면 복권으로 벌어먹고 살아도 될 것 같다. '상대의 실수 덕에 이겼다'. 이건 그나마 솔직하긴 한데,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의미가 없다. 이쯤 되니 바둑팬들도 '그래, 뭐 또 운이 좋았다고 하겠지'라고 생각할 지경이다. 대체 왜들 이러는 걸까?

"선거에서 패배한 것은, 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고이즈미 신지로 - 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11702

이 의문에 답을 찾으려면 우선 바둑이라는 게임의 구조에 대해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게임은 '승리 조건'이 명확한 편이다. 그 어려운 체스나 장기도 중요한 말과 덜 중요한 말이 나뉘고, 스타나 롤도 최소한 상대의 기지, 핵심 유닛과 자원의 양 등이 존재한다. 즉 아예 모르는 사람이 봐도 상황판단과 유불리를 짐작할 수는 있다. 반면, 하지만 바둑은 모든 돌의 능력치가 똑같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선수들마다 의견이 갈린다. 아니, AI조차 판단이 통일되지 않는다. 그 와중에 바둑판 위의 모든 상황은 눈앞의 '적'과 공유한다. 이런 배경에서 상대와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해야 상대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시합을 앞둔 바둑기사들은 잠깐의 뽕맛을 위해 감당할 수 없는 큰소리를 친다거나 일어난 일을 과대포장 하려는 생각 자체를 거의 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는 것이다. 바둑기사들은 가식이나 허세가 없다. 바둑이 인생의 큰 부분이 된 순간부터 가식을 달고 사는 것이 너무 괴롭기 때문이다.


일단 구조를 이해했으니, 이번에는 지켜보는 우리의 입장을 살펴보자.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있다. 시합 전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다. 이때야 뻔한 말을 해도 '뭐 인터뷰까지 잘해야 되나. 바둑을 이겨야지.' 정도로 생각한다. 그래도 시합 이긴 다음에는 "제가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시원~하게 이겨버렸습니다." 같은 식으로 말 한마디 해주면 좋을 텐데. "아, 그래도 상대 선수가 실력은 좀 는 것 같네요." 같은 말까지 얹어주면 스트레스가 싹 가실 텐데. 꼭 보면 한참 생각하다가 "운이 좋았어요" 같은 소리를 하면서 초를 친다. 왜들 이러는 것일까?


꼭 사물이 움직일 때만이 아니라 사람이 생각을 할 때도 '관성'이라는 것은 작용한다. 내가 응원하던, 대국에서 승리한 선수의 입장에서 상황을 한번 따라가 보도록 하자.


오늘 시합은 저녁 7시 대국이다. 대국 시작하기 몇 시간 전부터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애를 쓴다.

대국이 시작되었다.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수를 찾고, 계산을 해 가며 최선의 수 하나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쓴다. 마침내 상대가 항복 선언을 했다.

아, 이겼다. 몇 시간을 견디고 나서야 이 고문에서 비로소 해방이 되었다. 뇌가 약간 긴장을 푼 순간, 해설자가 마이크를 쥐어주더니 "OO 선수, 승리한 이유가 뭔가요?"라고 묻는다.

갑자기 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한다.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는 했는데 머리로 의미를 뜻을 이해하는 데까지 10초가 걸린다. 머릿속에서는 '일단 대답부터 해!'와 '뭔 대답을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나지?'라는 두 개의 자아가 충돌한다. 하지만 그 충돌은 금방 끝난다. 언어 두뇌를 몇 시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터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따라서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을 뱉는다.

(왜 이겼는지는 연구를 해봐야 알겠지만 안 봐도 알겠는 건)"상대가 저기서 실수했어요."

(나 같으면 그런 실수 안 할 텐데 상대는 한 걸 보니)"운이 좋았어요." 등등의 대답을 간신히 끌어낸다.

다행히 해설자가 눈치를 채준 것일까. "여기서 OO선수가 좀 유리해진 것 같아요." "OO선수, 이 수는 미리 보고 있었나요?" 등으로 "네"라고만 답하면 되는 친절한 질문을 해 준다. 이제 좀 긴장을 풀어도 되겠군.

그 순간, "마지막 질문인데요, 앞으로의 각오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어온다. 아, 젠장. 쉬운 질문을 연속해서 했던 건 함정이었나? 갑자기 어려운 질문이 들어오니 정신이 멍해진다. 앞으로의 각오? 당장 집에 가서 뻗고 싶은데 뭔 앞으로야. 아, 아니.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 그냥 다 이기겠습니다? 솔직히 그럴 자신은 없는데... 아, 그런데 처음 질문이 뭐였더라? 시간이 흘러간다.

답이 늦자 해설자가 쳐다본다. 생각하는 척 고개를 돌리자 카메라맨과 눈이 마주친다. 그는 그냥 쳐다본 것뿐이지만, 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보니 그 눈빛이 '빨리 끝내고 퇴근해야 되는데 왜 시간을 끌고 있냐'는 원망 섞인 눈빛처럼 느껴진다. 일단 뭐라도 얘기해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어..그..앞으로..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해설자는 "네, OO선수 다시 한번 승리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고 마무리 멘트를 하며 이 고문은 막을 내린다.


그들의 입장이 되어 보니 뻔한 멘트만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우리는 어쩌면 시합 전후에만 인터뷰를 요청해놓고 선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면 인터뷰나 아예 날 잡아서 유튜브 영상을 찍는 경우도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프로기사들은 꽤나 자기 얘기를 잘하는 편이다. 인터뷰 못 한다, 못 한다 하기보다 '잘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인터뷰를 한다면, 다시 말해 '시합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면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24-25 하나은행배 슈퍼매치> 4강전

(흑)박정환(백)신민준

10보 (130수~179수)

<실전진행1>

<실전진행1>

130은 [가]와 144를 맞보기로 하는 수. 흑은 133으로 하변을 살렸다. [가]로 끊으면 [나]에 둬서 산다. 134~143은 필수. 해두지 않으면 흑에게 140자리 빠지는 걸 선수로 당한다. 144로 끊어갔지만 149가 좋은 수. 깔끔하게 중앙 흑을 잡을 수 없다.

<실전진행2>

<실전진행2>

150을 교환해두고 152로 잡을 수밖에 없다. 흑은 155로 상변 백을 가두며 승리를 확정짓는다. 승부와는 관련 없지만 165도 좋은 수. [가]의 후속수단을 남기며 3~4집 이상 이득을 봤다.

<참고도1>

165로 두었을 때 백은 왜 166으로 둔 것일까.

<참고도1> 2로 받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렇게 두면 흑3이 선수가 된다. 그래서 이후 진행을 할 때 흑9로 한 수를 벌 수 있다.

<실전진행3>

168은 자살 공격. 지금은 어떻게 둬도 안 되는 상황이다. 179까지 흑이 살아나가자 중앙 백이 모두 잡혔다. 179가 놓이고 신민준이 잠시 판을 바라보다가 항복을 선언했다.














승부가 끝난 후 인터뷰가 이어졌다.


(해설자) "경기 내용을 보니까 하변 끊어간 것처럼 수도 잘 보는 것 같고,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 실제로는 컨디션이 어떤가?" (속뜻 : 곧 춘란배 결승인데, 너 오늘 두는 거 보니까 잘하겠는데?)


이 질문에 박정환은 이렇게 답했다.


"연습대국에서는 내용이 좋지 않았는데 오늘은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속뜻 : 괜히 기대해서 부담주지 마십쇼)

"그리고 하변에서 끊는 수 뒀을 때 상대가 한 점 잡고 버텼다면 정말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속뜻 : 진짜 어려웠음 - 7편 참조)


그다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오늘 운이 좀 좋았던 것 같아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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