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은행배 슈퍼매치 4강전 - 박정환 VS 신민준 (8)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바둑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감정에 휘둘리게 된다면 형세나 다음 수의 가치 등을 판단할 때도 편향되기 쉽고, 더 일찍 포기하게 된다. 평정심을 잃은 상대는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둑 선수들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도록 훈련받는다.
요즘에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이지만, 예전에는 실수했을 때, 좋다고 느낄 때 등이 표정에 다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이창호 9단은 '어떤 상황에서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는 의미로 '돌부처'라는 별명을 얻었다. 바둑인들에게 '포커'하면 연상되는 첫 번째 인물은 차민수 7단일 가능성이 높지만 '포커페이스' 하면 모두가 이창호 9단을 떠올릴 것이다.
예전부터 모든 고수들이 그런 자세를 갖추고 있던 것은 아니다. 이창호 9단의 스승인 조훈현 9단의 경우에는 빈말로라도 품위 있는 대국매너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잡생각을 몰아내기 위해(인 것 같다) 끊임없이 이런저런 말을 내뱉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가장 레전드로 남은 일화는 상대 대마를 다 잡은 상황에서 상대가 머리를 싸매고 있자 "다~죽었네~다~죽었어~"라고 흥얼거렸다는 이야기이다. 작정하고 놀리려고 한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인 것이 더 놀랍다. 이런 '트래시 토크'는 한국기원이 대대적으로 경기규정을 개편하면서 금지되었다. '주의' 받을 행동의 첫 번째에 '콧노래 부르기'가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를 저격한 듯한 느낌도 든다. 어쨌든 요즘에는 '트래시 토크' 자체가 자신을 더 갉아먹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누구도 굳이 그런 행동을 해서 상대를 긁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조훈현 9단이 유독 심했을 뿐, 많은 선수들이 감정을 내비치는 편이었다.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맨 처음에 이야기했듯, 평정심을 잃으면 상대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그런데도 그 시기에는 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약했을까?
조훈현 9단의 전성기인 70년대 후반~90년대에는 '바둑이 곧 생활'이었다. 두 대국자에게 기본으로 무려 5시간 정도가 주어졌기에 초읽기까지 합치면 11시간이 걸리는 판도 있었다. (요즘에는 속기대국은 1~2시간, 준속기 2~4시간, 장고대국은 4~7시간 정도가 걸린다) 워라밸도 뭣도 불가능한 환경이다 보니, 밥 먹는 시간도 대국의 일부고, 담배타임을 가지려 하면 자기 시간을 써서 가야 하고, 낮잠도 마찬가지였다. 즉 24시간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고 살던 사람이 아닌 이상 대국 내내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 텐데, 억지로 평정심을 끌어올릴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창호 9단이 등장한 이후부터 '상식'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11세 때 프로가 된 그는 누구와 두더라도,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크게 바뀌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당시 10대 중반에 불과했던 이창호의 포커페이스를 본 사람들은 '어떻게 저 나이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냐' '인생 2회차 아닐까?' 등의 표현을 써 가며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려 들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역시 세계 최고는 다른가 봐'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가 많았다.
그 이후,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선수들이 등장할 때마다 '제2의 이창호', '이창호 페이스를 갖춘 소녀'라는 별명을 붙이는 등 이창호라는 이름은 포커페이스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평정심 유지를 잘하는 선수들이 많이 나오면서 사람들은 '평정심 유지'라는 것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바둑도장에서 프로지망생들을 교육할 때 '평정심 유지'는 맨 처음 강조하는 역량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평정심, 평정심, 평정심' 계속 주입식(?)교육을 받은 데다가 '2~4시간 동안'만 평정심을 유지하면 되는 지금 시기에는 많은 프로기사들이 대국 중에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편이다.
이창호는 인생 2회차 먼치킨이 아니었다. 굳이 '평정심을 잃어도 어쩔 수 없는 경우'라는 핑계를 만들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함을 증명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포커페이스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다.
<24-25 하나은행배 슈퍼매치> 4강전
(흑)박정환(백)신민준
8보 (99수~107수)
<실전진행1>
한 방 먹었을 때의 반응은 초일류 선수들 사이에서도 개인차가 어느 정도 있기는 하다. 박정환은 실수를 해도 크게 드러나지 않는 반면, 신민준은 조금 더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는 편이다. 필자는 두 선수 모두와 대국해 본 경험이 있는데, 감정을 전혀 엿볼 수 없던 박정환 쪽이 더 어려운 벽으로 느껴졌다.
신민준은 99의 역습을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 99가 놓이자 깊게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 의자에 기댔다. 이 한 수에 백은 응수 두절이다. 어떻게 받더라도 백 모양은 망가지게 되어 있다. 신민준이 고통스럽게 다음 수를 찾는 동안, 박정환은 여유롭게 물병을 들어 목을 축인다.
백에게 왜 응수가 없다는 것일까. <참고도1> 백1로 막는 것이 유일한 수이다. 한데 2로 치받아 끊는 수가 있다. 5로 두 점은 잡지만 6,8로 우변이 뚫리고 나면 우변 흑집을 깎으려고 들어간 백세모는 상당히 민망해진다.
<실전진행2>
신민준은 100으로 손을 돌렸다. 완전히 한 방 먹은 것을 자인한 셈. 끝낼 찬스임을 직감한 박정환은 2분 정도 생각한 뒤 101로 끊어갔고, 107까지 우변을 완전 포위했다. 이 집이 모두 굳어지면 승부는 끝이다.
흑이 101로 끊어간 것은 괜한 분란을 일으켰다. <참고도2> 흑1로 치받고 나왔다면 흑이 두터워져서 백이 더 이상 해볼 곳이 없었을 것이다.
백도 106이 아쉬운 수였다. <참고도3>1로 중앙 쪽을 두는 것이 좋았다. 흑2를 당하는 것이 집으로 크긴 하지만 3으로 중앙을 누르는 것이 더 중요한 자리였다. 5를 교환해 두고 7로 좌상을 잡았으면 아직 흔들어 볼 여지가 있었다.
우변 흑 모양이 모두 집으로 굳어지면 기회는 없다. 신민준은 흑의 작은 틈이라도 찾기 위해 우변을 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