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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결정력

하나은행배 슈퍼매치 4강전 - 박정환 VS 신민준 (9)

by 이연
qk. 돌부처.PNG

바둑은 1:1 게임 중에 역전승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종목으로 꼽힌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 내가 유리한지 확신을 가질 수 없어 강하게 두었다가 역습을 당했다.

- 안전하게 가려고 손해를 봐주다가 형세판단 착오로 따라 잡혔다.

- 후반 쪽 실력에서 밀리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 정확하게 수를 찾기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다.

바둑은 '한 수만 삐끗해도 뒤집힌다.'

야구의 경우, 점수 차이가 좀 나면 희생플라이 한 점 정도는 별로 개의치 않고 공을 던진다. 축구에서는 유리해지면 엄살을 피우며 땅바닥에 누워버리기도 한다. 체스나 장기도 막바지에 가면 슬슬 방어하면서 기물 차이로 이긴다. 그 밖의 거의 모든 게임에서 한 수 정도는 실수로 버려져도 확립된 우세가 확 뒤집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둑은 많이 유리한 상황이었더라도 한 수를 버린다면 무조건 역전이고, 최선에서 약간 빗나간 정도여도 큰 손해를 보게 된다. 한마디로 다른 종목에 비해 '유리하다'는 기준은 너무 낮고, '정상적인 운영'의 기준은 너무 빡세다. 그러니 역전당하기 쉬울 수밖에.


바둑에서는 '유리해지는 능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상대가 완벽하게 두면 유리해질 수 없으니까)

'유리한 바둑을 지켜내는 능력'이 골 결정력에 가깝다.


바둑은 우리에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긴장을 풀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단 한 수도 빗나가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의 집중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24-25 하나은행배 슈퍼매치> 4강전

(흑)박정환(백)신민준

9보 (108수~129수)

<실전진행1>

<실전진행1>

신민준은 108로 우변 공략의 첫 물꼬를 텄다. 박정환은 어떻게 두더라도 크게 유리하다 보니 오히려 고민이 되는 상황이다. 그냥 받아둬도 아무 수가 없긴 하지만 최강으로 둬도 안 될 리가 없어 보인다. 박정환은 잠깐 고민하다가 109,111 최강으로 받아쳤다.

<실전진행2>

<실전진행2>

신민준의 손이 빨라진다. 수를 본 것일까, 아니면 '어차피 답도 없다'는 체념일까. 112,114는 선수 끝내기. 우변에서 뭔가 해볼 여지를 만들려면 116밖에 없다. 117은 절대수. 118,120으로 공격해 보지만 121로 뚫리자 오히려 위쪽 백이 위험해지는 느낌이다.

<참고도1>

116은 왜 '이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일까.

<참고도1>을 보면 알 수 있다. 수상전으로 이기려면 백1로 젖혀야 한다. 하지만 2,4로 끊어오면 중앙 두 점이 잡히기 때문에 나머지 백도 모두 잡히게 된다.

<참고도1-1>

<참고도1-1> 백세모 자리에 돌이 있다면 3으로 막을 때 호구모양이 된다. 물론 실전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실전진행3>

<실전진행3>

신민준은 괴롭다. 혹시 기적을 일으킬 방법이 없을까 한참 고민해 봤지만 예상했던 대로 뾰족한 수가 없다. 122로 하나 끊어둔 다음 124,126으로 살려 나온 것은 생존의 맥점. 우변의 흑집이 많이 깨졌다. 하지만 127,129로 중앙 백 모양이 모두 깨진 것이 훨씬 크다. 인공지능의 승부예측은 예상 흑 승률 99%. 이제는 뒤집힐 수 없다.

<참고도2>

그나저나 122는 왜 끊어둔 것일까.

<참고도2>를 보면 알 수 있다. 실전과 똑같이 진행된 경우 [가]에 찝어서 [나]와 [다]를 맞보기로 하는 수가 생긴다. (a의 약점은 방비한 다음 [가]를 둬야 함)

<참고도2-1>

백세모가 교환되어 있으면 이야기가 다르다. 흑이 1로 약점을 방비할 때 2를 선수할 타이밍이 생겨서 흑이 5로 찝는 것이 불가능하다.




박정환은 승리를 확신한다.

이런 때 필자라면 변수가 생길 곳이 있는지만 대충 확인한 다음, 괴로워하는 상대를 보며 승리감을 만끽하겠지만, 박정환은 그저 침착하게 판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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