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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호흡' 이라는 것은

하나은행배 슈퍼매치 4강전 - 박정환 VS 신민준 (7)

by 이연

바둑TV, 바둑 잡지 등을 보면 자주 나오는 중요한 말이 있다. 바로 '승부감각'과 '승부호흡'이다. 한데 '승부감각이 있다'고 하거나 '승부호흡이 좋다'는 식으로 이 말을 쓰곤 하는데, 이 '승부 뭐시기' 들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 승부의 호흡.png 승부의 호흡 제 1형! 아.. 이게 아닌가?

승부감각은 '지금이 승부처다'처럼 중요한 상황임을 인식하는 감각을 말한다. 승부감각이 예리할수록 더 중요한 상황에 강해진다. 조금 세분화하자면 '수 감각'과 '승부처 감각'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수 감각'을 먼저 설명하자면, 시간을 아끼기 위해 대체로 뻔한 수는 큰 고민 없이 두고, 상대가 모양 그럴듯하게 두면 '상대가 알아서 생각했겠지' 같은 식으로 넘기기 쉬운데, (보통은 별 다른 수가 없음) 그 중에 가끔씩 '뻔한 수보다 더 좋은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저쪽 상대 모양, 뭔가 수가 있겠는데' 같은 느낌이 올 때가 있다. 그러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읽게 된다.

'승부처 감각'은 '지금 중요한 상황이다'라고 느껴지는 감각이다. 이것은 효율적인 시간 배분과 관련이 큰데, 지금 기회를 놓치고 적당히 넘어가면 나중에 아무리 시간을 써도 뒤집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수 감각은 답이 있는 부분이기에 수를 많이 읽다 보면 저절로 강해지는 능력이다.

반면 승부처 감각은 효율적 시간 배분이 핵심이기 때문에 이쪽을 키우려면 연구할 때 의식적으로 '여기가 중요한 장면 같다'는 것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승부호흡은 '지금 강하게 나가야 상대를 흔들 수 있다'처럼 상대의 심리, 평소 스타일 등을 토대로 전략적 선택을 하는 능력을 뜻한다. 승부감각이 공부와 경험으로 다져진 지식이라면, 승부호흡은 어려운 문제에서 정답 가능성 높은 번호를 찍는 능력이다.

승부호흡은 사실상 의도적으로 키울 수 없다. '정답'이 있거나 '최선의 수' 같은 것을 안다면 그냥 그 길을 가면 그만이다. 굳이 그렇게 복잡한 로직을 거치는 것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꿰고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은 갖고 있는 지식에서 모자란 부분을 승부호흡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승부호흡을 다지는 방법은 하나다. 대국을 많이, 아주 많이 하는 것이다. 익숙한 모양으로 흘러가든,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 나오든 간에 완전히 같은 바둑은 절대 나오지 않으며 매번 새로운 판단을 해야 한다. 그렇기에 많은 양의 대국은 승부호흡을 훈련하기에 좋은 연습이 된다.


<24-25 하나은행배 슈퍼매치> 4강전

(흑)박정환(백)신민준

7보 (87수~99수)

<실전진행1>

<실전진행1>

흑이 87로 붙이자 신민준은 큰 고민 없이 88로 젖혀갔다. [가]로 두어 빠져나가는 것은 당연하고, 그다음 수읽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상대는 바로 그 수를 두지 않았다. '뭐가 있나?'라는 생각이 떠오르기 직전, 박정환이 89자리에 돌을 놓았다. 신민준은 순간적으로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인다.

<참고도1>

<참고도1>이 신민준이 예상했던 그림. 흑이 깔끔하게 살아 나오며 이득을 봤지만 차이는 크지 않다. 천천히 추격하다 보면 기회를 노릴 수 있는 정도이다.

<참고도2>

그렇다면 <참고도2> 흑1은 무슨 의미인가. 1은 원래 2로 받아주면 2~3집 이상의 대손해수다. 하지만 2로 잡는 순간, 3이 선수가 되어 5,7로 끊어가면 장문이다. 원래는 [가]로 단수쳐서 나가면 되는 모양이었는데 흑3에 돌이 놓이면서 [라]로 막는 수가 성립하게 된다.

<참고도2-1>

그렇다면 <참고도2-1> 백2로 두면 문제없는 것 아닐까? 물론 중앙 쪽 끊는 수는 사라진다. 하지만 이때는 흑이 3,5를 선수한 다음 7자리 붙이는 수가 수상전의 맥점이라서 백이 안 된다.

<참고도2-2>


이후 백은 <참고도2-2> 1,3으로 둘 수밖에 없는데 6까지 진행되면 패가 된다. 수가 없던 곳에서 패가 났으니 승부는 해보나 마나다.

<참고도3>

이 두 가지 수를 모두 막아내는 수는

<참고도3> 백1뿐이다. 이때는 똑같이 흑도 2~6까지 연결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가]자리가 흑의 선수가 된다. [가]를 선수 당하는 것은 거의 3~4집 손해이기 때문에 이 결과는 흑이 크게 유리하다.


어느 쪽을 택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 신민준의 고심이 깊어져간다. 그런데, AI는 마치 발상의 전환과도 같은 해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참고도4>

AI가 제시한 수법은 놀랍게도 <참고도4> 1로 한 점을 잡는 것이다. 흑2가 선수면 4,6으로 장문이 되어 백이 모두 잡힌다는 것은 아까 알아봤다. AI는 무엇을 본 것일까?

<참고도4-1>

AI는 <참고도4-1> 1로 단수친 다음, 3,5로 움직인다. 프로기사급의 실력자라면 모를까, 여기까지만 보고 이 수순의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좀 더 알아보자.

<참고도4-2>

<참고도 4-2> 흑1로 바깥쪽을 지키면 백은 2로 끊어서 수상전을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수상전을 백이 이기기 때문에 흑이 바깥을 지키는 수는 불가능하다.

<참고도4-3>

<참고도4-3> 흑이 1,3으로 조여 가면 6까지 수상전은 빅이 된다. 하변 흑세모들이 잡혔기 때문에 흑이 전부 잡힌 모양이다.

<참고도4-4>

<참고도4-4> 흑이 1로 끊고 밖으로 나가는 경우에는 6,8로 조여 가면 된다. 9때 10으로 조이면 하변 흑은 2수, 중앙 백은 3수로 백이 한 수 빠르다.

<참고도5>

따라서 흑은 <참고도5> 1로 받을 수밖에 없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참고도5-1>

백은 1로 끊어두고 3,5로 덮어가는 것이 좋은 수. 이 변화는 너무 어려워서 정상급 기사들뿐 아니라 AI조차도 오락가락한다.

<참고도5-2>

<참고도 5-2> 흑1이 좋은 수다. 백이 2로 붙여올 때 3으로 젖혀서 [가]로 우하귀를 잡는 수와 [나]로 우변을 넘어가는 수를 맞보기로 한다. 여기까지만 봤을 때는 아직 백이 다 잡힌 것처럼 보인다.

<참고도5-3>

백은 [가]가 선수인 것을 이용해 1을 선수한 다음 3으로 붙인다. 흑도 단순하게 받아서는 수가 모자라다.

<참고도5-4>

<참고도5-4> 1로 단수쳐서 나갈 때 2를 교환해 둔 다음 4,6,8로 쉴 틈 없이 몰아붙인다. 그다음 12,14로 반대를 조여붙인다.

<참고도5-5>

흑이 15로 나갈 때 16~20을 선수한 다음 22,24로 공격한다. 하변 백이 모두 잡혔지만 백도 우변 흑을 잡으며 X들을 집으로 만들었기에 백이 꽤 이득을 본 상황이다.

<참고도6>

원래의 모양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보인다. 우중앙 쪽의 백돌은 꽤 약한 돌이었고, 우변 쪽은 원래 흑집이었다. 백이 많이 잡혔지만 이 바꿔치기는 백이 확실하게 득이다.


다만 <참고도6>의 시점에서 여기까지 내다볼 수는 없다. 알 수 있는 건 중앙 백이 잡힌다는 것과 우변 쪽에서 뭔가를 해볼 수 있다는 것 정도다. 백 입장에서는 '어차피 당하면 진다'고 생각한 게 아닌 이상 선뜻 싸움을 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전진행2>

<실전진행2>

신민준은 고심 끝에 90으로 물러났다. 박정환의 승부호흡이 빛난 장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97까지는 예정된 진행. 불리한 백 입장에서는 변화를 일으킬 여지가 없어 너무 답답하다.

98은 그런 심정이 담긴 수다. [가]에 백돌이 오면 흑 모양은 망가진다. 그러니 흑은 당연히 받아줄 것이다.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98에 뒀다. 그런데 불안하게 또 박정환의 손이 멈췄다. '또 뭔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수를 찾아봤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딱히 무슨 수가 보이진 않는다. '하긴, 유리한 흑이 굳이 변화를 꾀하진 않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대가 [가]에 받아주면 어디 둘 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박정환의 손이 돌연 99로 향한다. 이번에는 둔기가 아닌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이 머리를 강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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