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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끈기 없는 독기병' 환자

'독기'와 '끈기'의 차이

by 이연

사전적 의미로 독기(毒氣)는 '독의 기운'을 뜻한다. 끈기(끈氣)는 '끈질긴 기운'을 뜻한다.


독기는 고통을 견디는 힘이다. 끈기는 다음 내가 갈 길을 찾는 힘이다.

독기는 생존할 때 기본이다. 끈기는 성취할 때의 기본기이다.

독기는 위기 상황에 본능적으로 발동한다. 끈기는 평상시에 노력해서 유지하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모든 순간 독기에 물든 채로 지냈다. 심지어 독에 더 깊게 물들고 싶어 했다.

독기에 물든 채로 고통을 이겨내며 성취를 얻으면 별 것 아닌 성취에도 기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독기를 내려놓았다. 지치기도 했고 24시간 독기를 품을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독기를 내려놓자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고통을 견뎌야 얻어지던 성취를 너무나도 편안하게 얻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전까지 얻은 성취를 좀 더 쉽게 얻을 뿐, 그 이상을 해낼 수는 없었다.


시합 준비에 지나치게 열을 올릴 필요는 없어졌지만 성적과 승률은 오르지 않았다.

이번에 올렸던 [바둑리그 '기자' 참관기 1~3]. 예전 같으면 2~3일 걸렸을 분량이지만 5시간 만에 그만큼을 써 냈다. 하지만 글 작성 후 이틀 반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 했다.


나는 독기에 물든 채로 견디는 법은 오래 훈련했지만 끈기있게 노력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건 훈련하지 못 했다.


사람들은 독기를 품고 힘든 시간을 견뎌낸 사람들을 보며 본받자고 한다.(저런 환경에서도 저만큼 해내다니!)

우리보다 끈기 있게 노력해 큰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보며 흠결을 찾는다.(나도 저 정도 됐으면...)


나라고 딱히 다를 건 없었다. 지금도 힘든 상황을 이겨낸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다.

다만 생각이 바뀐 부분은 있다. 지금의 내가 본받아야 할 사람들은 끈기 있게 노력해 성취한 쪽이라는 것.


독기를 품고 견뎠던 때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바둑이나 글쓰기에 미친 듯이 빠져든 것도, 이만큼 할 수 있게 된 것도 독기를 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그렇게만 살았기에 눈앞의 성취에 목 매고, 할 일 없으면 퍼져있는 사람이 된 것도 사실이다.


나는 아직 어떻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건지, 어떤 것이 끈기있는 자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내 성격상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건 답답해서 못 할 것 같다.

한 번에 세 걸음, 네 걸음도 갔다가, 좀 힘들면 한 걸음씩 가고, 그런 식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나는 앞으로 끈기 있게 여기에 글을 써보려고 한다.

좋은 글을 남기기 위해 독기를 품고 길게 쓰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냥 [오늘의 명언] 처럼 한 문장만 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정 바쁜 날에는 글을 못 쓸 수도 있겠지만 크게 신경쓰이지는 않는다. 브런치북 제목에 떡하니 박아뒀지 않나. '그냥 쓰는 거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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