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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고민해, 그냥 다 쓰면 되지

바둑리그 '기자' 참관기(3)[完]

by 이연

4국은 박종훈(38위) VS 한상조(30위)의 대결. 우리는 '5국까지 갈 것 같다'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지만 한상조가 승리해서 여기서 끝나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슬픈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법. 한상조가 초반에 무리한 싸움을 걸어가더니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고 자멸해 버렸다.


(나)"결국은 5국을 가네.."

(승민)"문제는 이 판 끝나려면 20분 넘게 남았어."

(나)"아까 하던 건 다 했나?"

(승민)"다 했지. 사진이랑 해설이랑.."

(나) "할 만한 게.."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나)"아까 보여준다던 글, 그거 아직 안 봤지 않아?"

(승민)"안 봤나?"

(나)"안 봤어. 사진 작업 하느라고.."

(승민)"자, 여기."


승민이가 핸드폰을 건네줬다. 이번 글의 제목은 [나의 바둑]이었다. [행복]을 이미 읽어본 나로서는 큰 기대는 하지 않고 글을 읽었다. 그런데 첫 문장부터가 달랐다. 그냥 바둑을 좀 아는 사람이 '이렇게 하면 잘 될 수 있어~' 하면서 적당히 던지는 말이 아닌, '오승민' 만이 쓸 수 있는 자신만의 이야기. 이전에 나한테 보여준 글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띠용.PNG 눈이 탁 떠지는 글 (출처:pixabay)


(나)"이건 되게 잘 쓴 것 같네. 역시 네 얘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

(승민)"아, 그건 좀 공들여서 썼지.(웃음)"

(나)"이건 얼마나 걸렸는데?"

(승민)"그건 거의 하루? [행복]은 2~3시간쯤 걸렸고."


물론 글 자체는 아직 개선할 부분이 있었지만 다음 글이 꽤 기대될 정도였다.


(나)"그러고 보니 브런치 작가를 한 이유가 뭐야?"


깊이 있는 글을 보고 나니 승민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어떤 목표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승민이는 내 말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명쾌하게 답했다.


(승민)"글을 10개 써서 [브런치북]으로 낼 거야. 내 인생 이야기, 내 바둑 이야기, 내가 연구해 온 바둑이론이나 경험했던 것 모두 쓰고 싶어."


그 말을 듣자 조금 전 작가신청을 생각하며 고민하던 것들이 단번에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지? 내가 글을 쓸 소재가 있냐고? 누가 읽어주겠냐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것, 내가 깨달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쓰면 된다. 바로 나만의 언어로.


(나)"뭔가 멋있는 말 같네."

(승민)"근데 다음 걸 뭘 써야 할지가 좀 어려워. 바둑이론이나 준비 과정 같은 것도 쓰고 싶은데 10개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는 씩 웃었다.


(나)"뭘 고민해. 그냥 다 쓰면 되지. 10개만 쓰지 말고 20개, 30개 써버리면 되잖아?"


외계어.PNG 나만의 언어로.. 아 이게 아닌데 (출처:pixabay)


마지막판인 5국을 보면서 나는 바둑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까?' '내 바둑얘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 경험은 흔한 것일까, 특이한 것이었을까.' 등등 내가 만들어갈 많은 이야기들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승민)"다음에 보자!"

(나)"다음 글 기다릴게!"


승민이와 헤어지고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는 길,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기자실에 발을 들였고, 바둑리그 기사 제목을 만들어봤다. 내 친구가 글 쓰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친구의 꿈을 알았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꿈을 원한다는 것도. 물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운동 루틴도 깨졌고, 안 하던 군것질도 했다. 오늘 늦게까지 무리했으니 내일은 못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오늘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고.


잘했어.PNG 힘들긴 했지만 나 자신 칭찬해~ (출처:pixabay)


나에게 기자실은 어색한 공간이었다. 삭막하고 차가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나니 기자실은 더 이상 차갑기만 한 공간이 아니었다. 대국장에 모이는 프로기사들만큼이나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열정을 쏟아내는 곳이었다. 삭막한 면도 있지만, 동료와 함께하는 훈훈한 곳이었다. 히터도 빵빵했고.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브런치 작가'라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나에게 그곳은 '새로운 길을 열어준 곳'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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