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리그 '기자' 참관기(2)
사진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승민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승민)"너 말이야, 브런치 알아?"
(나)"브런치? 알지. 예전에 많이 봤어. 근데 그건 왜?"
(승민)"내가 이번에 브런치 작가신청을 했는데, 바로 작가선정이 됐거든!"
(승민)"내가 이런 글을 써서 선정됐는데..."
(나)"좋아, 일단 구독해놓을게."
(승민)"너도 작가신청 해봐."
(나)"되려나? 재밌을 것 같긴 한데..."
(승민)"나는 이런 글 써도 선정됐는데 뭐."
브런치 글쓰기라.. 사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나는 글을 쓰는 걸 꽤 좋아한다. 독자로서 브런치에 올라온 글도 많이 읽어봤다. 하지만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겠어'라고 마음먹는 건 좀 다른 문제다. 오픈된 곳에 올린다는 건 그 자체로 부담이 되니까. 그전까지 내가 주로 글을 썼던 곳은 '프로기사 밴드'(네이버밴드)였다. 그곳에서 나는 바둑리그 개선안, 경기규정 개선안, 심판 권한남용 문제와 이번 커제-변상일 규정 분쟁 등등 꽤 많은 주제로 글을 써왔고, 내가 '이런 변화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던 것들은 대부분 호평을 받았고, 실제로 바뀌어 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바둑계 문제]에 관한 의견이었고, 애초에 그곳은 [프로기사]만이 볼 수 있는 글이었다. '내가 브런치에 올릴 만한 글을 쓸 수 있을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까?' 따져볼수록 이 부분이 가장 불안했다.
(나)"그래, 일단 브런치는 그렇다 치고, 첫 판 기사는 어떻게 쓸 거야?"
쉽게 생각이 정리되지 않자 나는 일단 화제를 돌렸다. 1국은 세계 챔피언 출신 레전드 '원펀치' 원성진(7위) 여자 탑랭커 김채영(87위). 객관적인 전력은 원성진의 압도적 우세이지만 바둑리그 같은 초속기 대국은 얼마든지 이변이 일어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내가 화제를 돌린 순간 원성진에게서 큰 실수가 나왔고 그 한 번의 실수로 형세는 김채영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우리가 경기를 다시 보기 시작했을 때는 김채영의 압도적 우세였다.
(나)"저거 봐봐, 지금 브런치 얘기할 때가 아니네. 대박사건 나겠는데? 채영 누나가 이기면 뭐라고 쓸 거야?"
(승민)"글쎄다.. [결혼을 앞둔 김채영이 치열한 전투 끝에 원성진에게 승리.] 뭐 이런 느낌?"
음.. 뭔가 좀 밋밋한데.
(나)"아 그렇게 쓰면 맛이 안 사는데. 좀 더 자극적인 거 없나?"
(승민)"글쎄.. 나는 막 과장해서 쓰는 게 부담돼서."
승민이가 애매하게 반응하자 나의 미식가(?) 본능이 꿈틀거렸다.
(나)"잠깐만, 이거 내가 써볼래."
(승민)"그래, 해 봐."
승민이는 나한테 키보드를 넘겨줬다.
[3월 8일에 결혼을 앞둔 김채영이 달라져서 돌아왔다. '원펀치'를 상대로 막강한 펀치력을 보이며 승리했다]
(나)"자, 이거 어때.'펀치'라임을 맞추니까 딱 적당하게 맛이 살잖아."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승민이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승민이 반응이 좀 애매했다.
(승민)"그.. 런가? 일단 괜찮은 것 같긴 하네."
살짝 싸한 느낌이 들었다.'내가 너무 신나서 까불었나? 어찌 됐든 승민이 이름으로 나가는 기사인데 선을 넘은 참견을 했나?' 약간 어색해진 분위기에 나는 일단 주제를 바꿨다.
(나)"어.. 일단 지금 형세를 보니까 김채영 쪽이 어지간하면 이길 것 같네."
(승민)"응. 근데 아직 몰라. 마무리에서 실수 좀 하면.."
(나)"하긴. 시간이 워낙 없으니까.."
바둑 얘기를 다시 시작하자 분위기는 쉽게 풀렸고, 대국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즐겁게 바둑 얘기를 했다. 결과는 무난한 김채영의 승리. '내가 쓴거 괜찮지 않았어?'라고 묻고싶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나)"이제는 두 번째 판 사진 찍어야겠네."
(승민)"어, 거길 또 갔다 와야 돼.(웃음)"
(나)"그래, 빨리.. 아니, 충분히 찍고 와."
승민이는 카메라를 들고 일어나면서 내가 예상치 못한 얘기를 했다.
(승민)"너가 쓴 걸로 쓰자."
(나)"어?"
(승민)"너가 쓴 게 좀 더 괜찮은 것 같긴 해. '펀치'라임 그거."
(나)"어..? 아, 고마워!"
승민이가 나가고 나서, 나는 속으로 '나이스!'를 여러 번 외쳤다. 그리고 '나머지 판에 대해서는 괜히 나서서 까불지 말자'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승민이가 2국 사진 촬영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아까 사 온 포*칩을 뜯으며 조금 전의 고민을 다시 떠올렸다. '내가 작가신청을 하면 선정이 되려나?' '나는 무슨 글을 쓸 수 있지?' '내 글을 사람들이 읽을까?' 등등. 일단 '어느 정도의 글을 써야 작가로 선정되나?' 하는 부분이 가장 궁금했기에 승민이가 썼다는 글을 읽어보았다. 글의 제목은 [행복].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에 대한 본인 생각을 풀어놓은 글이었다. 글은 평범했다. '이 정도면 할만한데? 겁먹을 필요는 없겠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사진촬영 후 돌아온 승민이에게 물었다.
(나)"다른 글은 어떤 게 있어?"
(승민)"잠깐만. 제목이 뭐더라?"
승민이가 글을 찾고 있던 중 나는 고개를 돌려 중계영상을 봤다.
(나)"잠깐만. 벌써 바둑 끝장났는데?"
승민이가 고개를 돌렸다.
(승민)"벌써? 뭐야, 진짜네?"
(나)"이번 판은 너무 쉽게 끝났는데.. 이런 판은 뭐라고 써?"
(승민)"글쎄, 이건 그냥 [이창석 선수가 무난한 운영으로 승리했다.]이 정도?"
(나)"진짜 쓸 게 없긴 하다. 너무 싱겁게 끝나서."
(승민)"한 10분 있으면 끝나겠네. 또 사진 찍으러 가야 되나."
(나)"어디서 저렇게 망한 거야?"
역시 바둑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빨리 갔다.
(나)"2-0이네. 3국 이기면 너 바로 퇴근이야?"
(승민)"아니, 이제 사진 보정을 하고서 기사 써야지."
(나)"그럼 사진 보정하는 것도 좀 볼래. 작업하는 김에 사브* 쿠키 좀 뜯을게."
(승민)"그래. 근데 아마 작업 중에 3국 찍으러 가야 될 거야."
사진 보정은 말로만 들었던 건데, 글 쓰는 것과는 또 다른 세계였다.
(승민)"이렇게 해서 필요 없는 부분을 자르고.. 조명을 좀 넣어주는 거지."
(나)"이런 게 있구나. 근데 좀 더 자르는 게 낫지 않나? 조명은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고."
(승민)"그래, 그쪽은 더 잘라야겠다. 그다음에는 이제 장면별로 사진 하나씩만 남기고.."
승민이의 설명 중에 내가 말을 끊었다.
(나)"잠깐만, 2국 끝났다. 가서 또 찍고 와."
(승민)"아, 오케이. 제발 3국에 끝나라."
(나)"플래그 같은데 그거."
승민이가 사진기를 들고 방을 나갔다. 나는 혼자 남아서 편집 중이던 사진을 봤다. 문득 '뭔가 까먹은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뭘 까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3국은 둘 다 세계 챔피언 출신인 신민준(6위) VS 나현(21위)의 대결. 객관적인 전력상 신민준이 유리하고, 신민준이 승리할 경우 3-0으로 끝나기 때문에(퇴근) 나와 승민이 모두 긴장감을 갖고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경기를 지켜보았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승민이었다.
(승민)"근데 이번 판 신민준이 지면 뭔가 5국까지 갈 것 같아."
(나)"그런가?"
(승민)"흐름이라는 게 있거든."
(나)"음.."
하지만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두 사람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계화면으로 눈이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아, 맞다! 민준이 형이 이기면 기사 제목은 뭘로 할 거야? 미리 정해두면 좋잖아."
(승민)"글쎄, [김채영, 원성진에게 승리] 뭐 이런 걸로 할 것 같은데?"
(나)"그거 좀 약한데. 내가 생각해 둔 제목 있어."
(승민)"뭔데?"
승민이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잠깐 뜸을 들인 후 말했다.
(나)"['원펀치'잡은 예비신부의 강펀치] 이거 어떤데."
승민이가 갸웃했다.
(승민)"결혼 얘기 넣는 게 맞나..? 내가 잘 아는 사이는 아니라서."
나는 단호한 말투로 가스라이팅을 시전 했다.
(나)"그럼! 무조~건 '김채영 결혼'갖고 최대한 어그로 끌어야지! 그리고 어그로 끌어줘야 돼 이런 건."
(승민)"그래, 아까 '펀치'라임 괜찮았던 것 같긴 해."
(나)(두배로 나이스!)
이 날의 기사 제목은 그렇게 정해졌다.
한편, 바둑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순조롭게 판을 짜나가던 신민준이 엉뚱한 수를 두었고, 조금씩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이거 왜 이러냐. 아까 말한 시나리오 나오는 거 아냐?"
(승민)"5국 가는 거?"
(나)"..."
(승민)"플래그 괜히 세웠네."
일단은 내가 화제를 돌렸다.
(나)"아까 사진 만지던 거나 보자."
(승민)"그래."
사진은 작업 중이던 그 상태 그대로였다. 승민이가 아까 하던 설명을 다시 시작했다.
(승민)"일단은 장면별로 사진을 하나씩만 남기고 파일 이름을 다 적어야 돼."
(나)"장면당 3장 정도 찍었네. 어떤 걸 남길 거야?"
(승민)"같이 골라보자."
(나)"난 사진 보는 눈은 좀.."
(승민)"다 거기서 거기야."
우리는 사진을 고르기 시작했다.
(승민)"이건 뭐가 나으려나?"
(나)"난 이거."
(승민)"음, 나도 그거 같긴 했어."
의외로 의견이 갈리는 경우는 없었다. 대략 7~8개의 장면이 있었는데 의견이 갈린 건 1번뿐이었다.
(승민)"일단 이 정도면 다 한 것 같네."
(나)"바둑은 어떻게 됐으려나.. 어?"
내 반응에 승민이가 놀랐다.
(승민)"뭔데, 이겼어? 퇴근?"
(나)"아니, 그건 아니고.. 근데 이 정도면 역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조기퇴근의 희망에 부풀었다. 심지어 나현의 실수가 여러 번 나오며 신민준의 확실한 우세로 뒤집혔다.
(승민)"이거 쫄린다. 여기서 지면 5국 갈 거거든."
(나)"근데.. 민준이 형 마무리가 좀 불안하긴 해."
(승민)"어, 그거 혹시.."
(나)"그냥 입을 다물어야 되려나."
하지만 신민준 역시 시간이 없어서 실수가 나왔고 결국 형세는 반집 차이까지 좁혀졌다.
(나)"저기만 두면 더 해볼 데 없는데."
(승민)"제일 뻔한 수라서 손이 안 갈지도."
(나)"다른 데 둘 데도 없는데 그냥 둬버리지."
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의 퇴근을 좌우할 수가 놓였다.
(나)"아.. 저거 뭐야"
(승민)"한 수 쉬었네.."
(나) "이건 졌다."
망설이던 신민준은 최악의 수를 두었고, 그 순간 나현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나)"오래 걸리겠네. 사브*나 먹자."
조기퇴근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