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하게 내리쬐던 태양이 힘을 잃고 슬금슬금 내려온다. 시퍼렇던 홍해바다는 드디어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넋을 놓고 다홍색으로 물든 바다를 감상하다 고개를 돌리니 낡고 허름한 카페가 보였다.
조심스레 들어가자,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붉은빛은 한 줌뿐이었고, 어둑어둑한 실내에서 사람들의 얼굴은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나는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밟으며 조심스레 그들에게 다가갔다. 빈자리에 앉으니 모임장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이제 시작할까요?” 그는 간단한 룰을 설명했다. 이 모임은 각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책을 소개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고 했다. 어떤 책이든 좋고, 어떤 방식으로 말해도 괜찮다. 발표가 아니니 그냥 책에 담긴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라고도 덧붙였다.
“부담 갖지 말고, 편안하게 즐기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카페 안에는 잔잔한 미소들이 번졌다. 누군가가 첫 번째로 책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고요함을 깨고 퍼져나갔다. 그렇게 책 한 권과 한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저녁빛이 천천히 카페 안을 채워나갔다.
그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저는 법정스님이 쓰신 <스스로 행복하라>라는 책을 가져왔어요.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 10번은 넘게 읽었어요.
힘들 때마다 이 책을 읽으면 의지가 돼서 어딜 가든 꼭 들고 다니는 책이기도 해요” 그의 손에 들린 책은 말 그대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모서리는 닳아 있었고, 표지는 빛에 바래 있었다. 하지만 그 낡은 모습이 오히려 이 책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곁을 지켜왔는지를 말해주는 듯했다. 조금은 쑥스러운 듯 책을 소개하던 그는 마흔 살 즈음으로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맑았다.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저렇게 눈빛이 맑을 수 있을까?’ 정성껏 닦아 반짝이는 유리구슬 같은 눈망울을 보며, 나는 그에게 묘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된 건 그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유난히 독서모임 인원이 적은 날, 우리는 모임이 끝나고 카페와 가까운 레스토랑에 가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식탁에는 뜨끈한 피자가 놓이기 시작했고, 피자를 한 입씩 베어 물며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됐는지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초롱한 눈을 꿈벅거리며 조용히 듣고 있던 그는 자신의 차례가 오자 나긋이 웃으며 마음속에 감춰둔 책의 서문을 열었다.
“제 자신과 약속한 게 있어요. 10년 동안 여기 다합에 와서 프리다이빙을 훈련하기로요. 그러고 보니 벌써 올 해가 9년째네요”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그는 피자를 한 번 더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아라비안 나이트 속 세헤라자데처럼 흥미진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스스로 ‘무의미하다’고 할 정도로 흘려보내듯이 살았다고 했다.
뚜렷한 꿈이나 목표가 없던 그에게 피시방은 인생의 낙이자 전부였다. 같이 게임을 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자신의 앞길을 찾아 떠날 때도 그는 컴퓨터 앞에 남아 후배들과 게임하는 걸 택했다. 어느새 그는 스물다섯이 되어 후배에게 ‘나이 먹고 왜 저렇게 살지?’라는 눈빛을 받는 선배가 되었다. 눈빛 너머로 한심함과 답답함을 읽은 그는 부끄러움이 확 밀려들어와 무작정 거리로 나와 일자리를 구했다. 마침 한 정육점에서 사람을 뽑고 있었고, 빈털터리었던 그는 숙소를 제공해 준다는 말에 그날로 일을 시작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33살이 되었다. 그동안 정육점에서 경력도 쌓고, 작은 전집도 차렸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다 접고 다시 2년 정도는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그날도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며 유튜브로 영상을 보고 있었어요. 아무거나 보고 있었는데 어떤 영상이 제 알고리즘에 하나 뜨더라고요”
중력에 이끌리듯이 영상을 클릭한 그는 앞으로의 인생을 뒤바꿀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 영상에는 한 남자가 물속에서 숨을 참고, 한 마리의 고래처럼 유유히 잠영하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발을 한 번 찰 때면 긴 오리발은 부드러운 곡선을 띄며 휘어졌고, 물결의 움직임에 따라 해초들은 커튼처럼 살랑였다. 고요한 물속은 오후의 햇빛을 받아 에메랄드 색으로 빛났는데 이 신비로우면서도 평화로운 풍경에 그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어떻게 하는 거지?’
운명처럼 다가온 그 영상은,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우듯 그의 내면에 불길 같은 열정을 피워 올렸다
“운이 좋았어요. 마침 그 남자가 저희 집 근처에서 강습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 남자가 한 것이 프리다이빙이라는 정보를 수집한 그는 그 길로 남자를 찾아가 교육을 받았다. 그는 화면 속 선생님의 모습처럼 물속에 들어가 오랫동안 숨을 참는 법을 익히고, 잠영하여 긴 오리발을 우아하게 차는 법도 배웠다. 그가 숨을 1초씩 더 오래 참고, 1m씩 더 깊이 내려갈 때마다 그는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큰 희열을 느꼈다. 물속에서는 세상의 시선도, 과거의 실패도, 아무것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 마주하며, 오래도록 잃어버린 자유와 몰입에 푹 빠지는 시간을 보냈다.
결국, 그는 스스로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앞으로 10년 동안 다이버들의 성지 다합에 가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기로.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한 9년 동안 그는 물속에 더 깊이, 더 오래 머물기 위해 달고 살던 술과 담배도 모두 끊었으며, 명상도 시작했다. 종종 목숨이 위험한 순간도 찾아왔다. 숨 하나로 물속에서 모든 것을 견뎌야 했기에 기절하거나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일도 있었다. 얼마큼 깊이 내려갈 수 있는지 측정하는 대회에서는 큰 부상을 당한 상태였음에도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냥 죽자, 이러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제 목숨과 바꿔도 좋을 만큼 사랑하는 게 생길지 몰랐어요.” 그의 눈빛은 그때의 물속을 그대로 품고 있는 듯 반짝였다. 나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그의 이야기에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겨 물었다.
"혹시 10년간 훈련할 돈은 어떻게 마련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