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10년간 훈련할 돈은 어떻게 마련하셨나요?”
그는 잠시 멋쩍게 웃더니 말했다.
“아..ㅎㅎ 대리운전을 하며 벌었어요. 계산해 보니 천만 원을 모으면 이곳에서 반년정도는 사는 데 무리 없더라고요. 돈이 다 떨어지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4~5개월 동안 열심히 벌고 다시 나와요. 대리운전도 생각보다 너무 잘 맞아서 일처럼 안 느껴져요” 그는 해맑게 말했지만, 나는 그의 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대가로 치렀을 혹독한 대가들이 슬며시 보였다. 모두가 걷는 밝은 길을 벗어나 혼자 걸어가는 그 길이 외롭고, 불안하고, 서러웠을 것이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듯이, 그의 아버지는 그가 한국에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그를 보며 미쳤다고 타박을 한다고 했다. “아버지가 저보고 미쳤다고 하면, 저는 맞아요~ 저 미쳤어요. 하면서 그냥 대리운전 하러 나가요. 부모님이 너무 신경 쓰일 때는 강남에 있는 별마당도서관에서 노숙을 하기도 해요. 꽤 쾌적하고 좋더라고요.” 순박하게 웃던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천천히 덧붙였다.
“생각해 보면 저는 프리다이빙을 알게 된 이후로 돈을 선택할 기회가 와도 늘 자유를 선택했어요. 돈보다 이집트에 와서 훈련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더 중요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행복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그 웃음은 묘하게 전염력이 있어서, 듣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삶이란 게 어쩌면 거창한 성공이나 명예가 아니라,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긴 여운이 남았던 만남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나에게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책인 <스스로 행복하라>를 빌려주었다. 한 번 읽어보고 싶다고 지나가다 뱉은 말에 그가 흔쾌히 빌려준 것이다. 누군가가 가장 아끼는 책을 얻은 나는 일부러 책을 며칠간 펼치지 않았다. 그처럼 소중한 마음을 고이 간진한채로 읽고 싶었다. 어느 여유로운 오후, 책을 펼치기에 알맞은 때가 왔다고 느낀 나는 곧장 가방에 넣어 가장 좋아하는 카페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가격이 싼 음료를 대충 주문하고는 책을 조심스레 펼쳤다.
책의 첫 장, 프롤로그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꽃들은 다른 꽃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다른 꽃들을 닮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 나름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라일락이 철쭉을 닮으려 한다거나, 목련이 진달래를 닮으려고 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모두 다 자기 나름의 특성을 힘껏 발휘하고 있습니다. 자기 내면에 지닌 가장 맑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그런 요소들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몫의 삶을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다 자기 몫의 삶, 자기 그릇이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그릇에 자기 삶을 채워 가며 살아야지, 남의 그릇을 넘본다거나 자기 삶을 이탈하고 남의 삶처럼 살려고 하면 그건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저마다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 홀로 태어나듯이 저마다 독특한 자기 특성이 있기 때문에 누구를 닮으려고 하면 자기 삶 자체가 어디로 사라지고 맙니다…<중략>”
나는 이 서문을 읽자마자 나는 그의 눈빛이 왜 그렇게 맑고 투명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의 눈빛은 험난한 세상을 껴안고, 자신만이 피울 수 있는 꽃을 피워낸 사람의 눈빛이었다.
변덕스럽게 찾아오는 파도는 출렁거리며 그를 어지럽게 했을 것이다. 그는 파도 밖으로 도망치기보다 바다의 품으로 더 깊이, 더 오래 머물렀다. 육지로 돌아오면 방 안에 홀로 앉아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는 밤도 많았을 것이다. 지독한 적막이 거센 바람처럼 외로움을 불러일으켜도 그는 꿋꿋이 태풍의 눈으로 걸어 들어가 홀로 버텨냈다. 꿈을 비웃는 자들에게 받은 질타는 내리쬐는 태양처럼 그의 얼굴을 뜨겁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지구에서 가장 강렬한 햇빛이 있는 이집트로 늘 돌아왔다.
쉼 없이 몰아치는 파도, 수 없이 불어오던 바람, 숨 막히도록 쏟아지는 태양은 결국 그가 무슨 꽃인지 알게 해 줬다.
그는 라일락도, 철쭉도 아닌, 물속에서 피는 꽃인 연꽃이었다.
파도는 물속에 뿌리를 내리게 해 주었고, 바람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줄기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태양은 꽃잎을 활짝 피워주며, 마침내 연꽃이 스스로 빛을 내게 해 주었다.
모든 시련은 비옥한 자양분이 되어 그가 물 위로 꽃 한 송이를 피워내는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그 순간, 그의 영혼은 정화되었고 눈동자는 맑고 투명한 빛을 머금었다. 이 책은 참 신기하게도, 그와 꼭 닮은 책이었다.
그를 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브루노마스’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가수였다. 대학교 4학년 때, 운 좋게 그의 내한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등장부터 화려한 그는 한 마리의 공작새처럼 자신을 쉴 새 없이 뽐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목청껏 소리 지르며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도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팔짱을 낀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어떻게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지금의 자리를 10년 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이토록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일까?
그를 관찰한 지 10분 만에 그 답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목에 선 핏줄에서, 동료들을 보며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 관객들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그가 이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게 묻어났다. 결국 그 분야에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의 직업을 빛내는 건지 아니면 그의 직업이 그를 빛내는 건지 모를 정도로 완벽하게 하나가 된 모습이었다. 그의 직업은 그의 정체성이자 그의 고유함을 증폭시켜 주는 수단이었다.
이집트에서 만난 그와 브루노마스는 직업을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재료로 쓰고 있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들이 부러웠다. 진정한 성공은 돈이나 명성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며 ‘나답게 존재하는 것’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엔 검은 바다를 노랗게 물들이는 큰 달이 보였다. 그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저도 언젠간 그런 일을 찾을 수 있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