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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삐 Aug 05. 2021

꿀삐의 난임분투기⑲

신비로운 입덧의 세계

나는 어느 순간 다가온 작은 생명체에 의해서 조종을 당하고 있다.


5주차-입덧의 시작

밥맛이 너무 좋다. 입덧이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과 함께 신라호텔 '파크뷰' 예약을 했다.

평일에도 어찌나 예약이 꽉 찼는지.. 가장 빠르게 예약할 수 있는 날짜가 2주 뒤라고 해서

부랴부랴 잡았다.

그런데.. 정확히 5주차 3일째부터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울렁거리는 느낌과 체한 것 같이 가슴이 답답한 기분은 도대체 뭐지?

'나 입덧 시작한 거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았는데 '복숭아' 뿐이었다.

남편은 한 개에 6,000원인 복숭아를 사 왔다.

내 인생 이런 호사는 또 처음이네..


6주차-입덧약 복용

며칠 동안 복숭아만 먹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근처 산부인과를 찾았다.

의사는 '디클렉틴'이라는 입덧약을 처방해주었다.

비타민으로 만들어져서 산모나 태아에게 부작용이 없는 대신 졸린 증상이 있을 거라고 했다.

토할 정도로 심한 입덧이 아니라서 저녁에 두 알을 먹고 잤는데,

이틀이 지나서야 속이 좀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울렁거리는 증상이 없어진 건 아니다.

살짝궁 '완화'되었을 뿐.

나는 내내 약 먹은 병아리처럼 무기력하게 잠을 자고, 깨어있는 시간에는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소울푸드'를 찾기 위해서 하루 종일 먹을 걸 생각했는데.. 음식 생각만으로도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티브이를 틀면 '먹는 방송'이 왜 이렇게 많은지.. 홈쇼핑에서도 음식 판매를 많이 해서 너무 괴롭다.

밥 냄새에 구토할 뻔 한 뒤로 밥은 쳐다도 안 본다.

대신 밀가루-특히 면이 당겨서 칼국수와 라면을 주식처럼 먹었다.

배고프거나 속이 빌 때마다 복숭아를 먹었는데 많이 먹을 때는 하루에 4개를 먹기도 했다.


7주차-모든 냄새가 싫다

김치, 마늘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다.

냉장고와 음식물쓰레기 통은 열어볼 염두가 안 난다.

남편의 바디워시 냄새, 주방세제 냄새, 빨래 세제 냄새가 다 역겹게 느껴진다.

(덕분에 설거지와 빨래는 남편이ㅠㅠ)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온갖 냄새 때문에 미치겠다.

아랫집에는 3대가 살고 있는데 아이가 있어서 그런지, 고기도 잘 구워 먹고 매 끼니를 잘 챙겨 먹는 것 같다. 삼겹살이나 김치찌개를 먹는 날에는 방에 들어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  

다행히 속이 울렁거리기만 할 뿐 토까지 한적은 없었다.(사실 그래서 입덧이 심하다고 사람들한테 말하기가 민망할 때도 있었음) 

여전히 1일 1라면을 먹고 있는데, 컵라면이 면발이 얇아서 그런지 더 잘 들어간다.

아침, 점심에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약발이 떨어지는 저녁 5시경부터는 울렁거림이 심해진다.

오후 10시에 약을 먹고 빈속에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자기 직전에는 시리얼과 우유를 먹었다.

주로 컵라면, 시리얼, 누룽지를 주식으로 먹었다.

2주 전에 예약했던 '파크뷰'는 결국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흐엉

친구들과의 모임도 입덧 때문에 취소를 했다..

피부관리도 잠시 쉬기로 했다..

나는 '집사람'이 되었다...


8주차-삶의 낙이 없어지다

하루 종일 뭘 먹으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완두배기 시루떡'이 생각났다.

남편을 시켜서 사 오게 했는데, 주변 떡집에 없어서 백화점에 가서 사 왔다.

너무 맛있어서 그 자리에서 한 팩을 다 먹고 다음날 또 사 오게 했다.

3일 내내 떡 사러 다니던 남편이 그냥 떡집에서 맞춰먹자고 해서 '반말'을 주문했다.

임산부에게 '팥'은 안 좋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일단 내가 살아야 하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갑자기 '물회'가 생각나서 아침에 남편을 졸라 '강원도'로 떠났다.

늘 맛있게 먹었던 '청초수물회'에서 물회 한 사발이면 속이 다 시원해질 것 같았는데....

왕복 6시간이나 걸려 먹고 온 결과,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는지..

속에 너무 찬 게 들어가서 그런지. 식중독이 걸린 게 아닐까 의심을 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았다..ㅠㅠ

당분간 '회'는 안 먹는 걸로..

3주간의 소소한 입덧으로 몸무게가 3 킬로그램 정도 줄었다.

과배란 주사의 영향으로 갑자기 늘었던 체중이 빠지면서 그냥 임신 전으로 돌아온 것뿐.

내가 먹는 걸 좋아하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이렇게 내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줄은 몰랐다.

나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되었다. 예전처럼 마음껏 먹고 싶다. 


9주차-친정에 가다

어릴 때 친정에서 먹던 음식이 자꾸 생각나서 일주일간 친정에 머무르기로 했다.

엄마는 칼국수, 된장찌개, 열무김치, 부추전 등 그때그때 내가 먹고 싶다고 하는 음식을 뚝딱뚝딱 만들어 주었다. 역시 남이 해준 음식, 특히 울 엄마 음식이 최고다!!

신기한 건 칼국수를 제외하고 친정에서 내가 찾은 음식들은 평소에 거들떠도 보지 않던 음식들이라는 사실이다.

엄마는 내 입맛을 돋우워 준다면서 평소에 좋아하는 닭볶음탕, 닭죽, 제육볶음을 해줬는데.

하나도 먹지 못했다. 그렇게 고기를 좋아하던 내가 고기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다.ㅠㅠ

동생이 사다 놓은 브라보콘(피스타치오 아몬드 맛)을 먹고 신세계를 경험했다.

피스타치오 아몬드 아이스크림 역시.. 싫어했던 맛인데.. 입덧이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친정에는 시리얼이 없어서 배고플 때마다 칼로리 밸런스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식빵을 구워 먹었다. 

'친정엄마' 음식으로 입덧이 완화되는 것 같았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다시 라면을 먹고 있었다.ㅠ


10주차-물냉면이 최고

이제는 라면도 질리고 누룽지도 질리고 복숭아는 쳐다도 보기 싫다.

대신, 매일 물냉면을 입에 달고 산다. 

집 근처에 있는 현대백화점에서 점심, 저녁을 해결한다. 하루에 두 번씩 백화점을 드나드는 우리 부부.

현대백화점에 가는 이유는 하나다. 현대백화점 안에 있는 한솔냉면의 '열무 물냉면'에 반했기 때문에..

갑자기 열무김치에 꽂혀서는 그냥 물냉면은 냉면이 아닌 것 같다. 

출출할 때마다 과자(꼬깔콘 매운맛, 매운 새우깡)와 아이스크림(스크류바-딸기맛, 폴라포-포도맛, 브라보콘-피스타치오 아몬드, 라이언바-자두맛)을 먹는다.


11주차-입덧의 끝은 언제일까

입덧이 없어지긴 하는 걸까? 출산해야만 없어지는 거 아닐까? 

막달까지 입덧을 한 임산부들의 후기를 보면서 두려운 생각이 든다..

친정엄마는 자꾸 그 정도 입덧은 입덧도 아니라며.. 입덧약도 먹는 데 왜 그렇게 유난스럽냐고 한다.(라떼는 말이야 시전~~)

나도 처음 겪는 입덧이라 당황스러운데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서운하다.

전원한 병원에서 첫 진료를 보면서 피검사를 했다. 임신 전보다 혈당이 높아졌단다.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달고 살았으니 그럴 수밖에.. 임당이 걱정되기도 하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다. 먹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안되는걸..ㅠㅠ

'입덧약'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소울푸드 찾기'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 

입덧에 의외로 샌드위치, 햄버거, 피자가 잘 들어간다는 글들을 보고 시도해봤다.

샌드위치와 햄버거는 실패. 피자는 성공. 그리고 피자도 고구마가 들어간 피자여야만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갈릭 디핑소스와 피클은 반드시 있어야 함)

그러다 어느 날 아침에는 갑자기 감자탕이 먹고 싶어서 남편과 점심을 먹으러 감자탕집에 갔다. 그동안 고기는 쳐다도 안 봤는데 뼈에 붙은 고기가 그렇게 맛있을 줄이야. 우거지가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지도 처음 알았다!!

감자탕을 먹고 나서 메슥거려서 사이다 한 병을 먹긴 했지만.. 이렇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하나하나 발견하는 게 또 행복이다. 문제는 감자탕에 꽂혀서 3일 내내 먹고 있는 중이라는 것..(여보 미안해ㅠㅠ) 

입덧 때문에 누워있으면 더 울렁거린 다는 걸 알고 나서는 밥 먹고 30분씩 산책을 하거나 그동안 못했던 집 정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확실히 가만히 있을 때보다 꼼지락 거리면 메슥거리는 느낌이 덜하다. 

그렇지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가지 늘어난 것뿐, 목구멍에 돌멩이가 하나 걸려서 답답한 느낌은 새벽녘 잠이 들 때까지 쭉~~~~~지속 된다는 거..ㅠㅠ


내일이면 12주에 접어드는데 과연 '12주의 기적'이 찾아올까?


나만의 쏘울푸드를 찾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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