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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삐 Mar 08. 2023

74화. 딱 3년만 참으면 됩니다.

며칠 전, 아이가 다닐 어린이집 신입원아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왔다.

쭈뼛쭈뼛 들어간 어린이집 입구에서 아이 이름이 적힌 '초록색 명찰'과 '오리엔테이션 자료', 간식을 받았다. 나는 어색하게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갔다.

좌석은 꽉 차 있었지만 가장 앞줄은 싹 비워져 있었다.

나는 가장 앞줄의 맨 가운데에 앉았다. 누군가가 옆을 빨리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곧 한 명의 여자가 내 옆에 앉았다.

쨍한 '초록색 명찰'을 달고 있는 여성에게 물었다.(초록색 명찰은 0세 반)


"아이가 몇 개월이에요?"


아이가 생긴 후 타인에게 말 거는 게 편해졌다. 특히 아이가 몇 개월이냐는 질문은.


"22년 2월생이요."

그녀의 아이는 우주랑 같은 달에 태어난 남자아이였다.


몇 마디 주고받다가, 이 엄마는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워킹맘’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의 아이는 엄밀히 말하면 '신입원아'는 아니었다. 이미 5개월째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는 아이였다. 부모는 엄마의 복직을 앞두고, 조금 일찍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고 한다. 퇴근 후 참석해서 그런지 조금 지쳐 보였는데, 오리엔테이션이 끝나면 아이의 '돌 접종'을 위해 병원에 간다고 했다.


왠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게 곧 내 모습이 될 텐데….



결혼 전, 직장의 여자 선배들은 아이가 아프다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늦은 출근을 하거나, 휴가를 쓰거나, 이른 퇴근을 했다. 아이 핑계를 대고 회식에 빠지는 일도 다반사고, 이른 아침에 출근을 할 일이 생긴다거나 주말에 출근할 일이 생길 때, 당직이나 비상근무 때에도 ‘아이를 돌 볼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수시로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나이 많은 남자 상사들도 그녀들에게 '유무언의 눈치'를 줬지만, 같은 여자라고 해서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건 아니었다. 여자 상사들은 대놓고 '나 때는 육아휴직이란 게 있었나, 모성보호시간이란 게 있었나'라고 요즘 애들은 참 편하게 회사 생활 한다고 말했다.


한 번은 회사에서 부서 단합 차 '82년생 김지영'을 관람하고 밥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비록 결혼하기 전이었지만,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라서 공감이 되었고, 친정 엄마 생각이 많이 나서 한바탕 울고 나온 후였다. 팀장, 과장, 부장이 마주 앉아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장 A : 영화 재밌었어? 근데 이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뭐야?

과장 A : 저도 왜 이 영화가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어요.

부장 A : 옛날 여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 아니야?

팀장 A : 저도 여자지만, 공감이 안 되네요. 저는 더 힘들게 육아해서.


그 후에 나온 말들도 대충 이랬다.

- (공유 같은 스위트한) 저런 남편이 있는데 왜 산후우울증에 걸리냐

- 다들 애를 낳는 건데 너무 유별난 거 아니냐

- 산후우울증으로 미치는 게 말이 되냐


'성인지감수성'이 많이 떨어지는 - 아니, 그게 뭔지도 모르는 - 사람들과 일하고 있다는 사실만 재확인했다.


그런데 나라고 해서 워킹맘을 따뜻한 시선으로 대했던 건 아니다. 때로는 '나도 아이가 있어서 빠질 핑계를 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나이 많은 여자 상사들이 '라떼 육아 - 옛날에는 육아하면서 일하기 더 힘들었다는 - 이야기'를 할 때면, '육아가 그렇게까지 힘든 일은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여성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 계획대로 척척되면 좋지만, 어찌 육아가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자연분만을 원한다고 자연분만을 할 수 있나. 모유수유를 하고 싶다고 모유수유를 할 수 있나. 순한 아이로 키우고 싶어도 아이 기질이 예민하면 순하게 키울 수 없고. 누구나 건강한 아이를 바라지만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다. 아이의 잠투정이나 이유식투정은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고. 갑자기 열이 나거나 아플 때는 또 얼마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지.

육아만으로도 이렇게 진이 빠지는데 '일'까지 해야 된다고?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분과 전문의 신의진은 ‘아이심리백과’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엄마들을 위한 특별한 스트레스 관리법을 제시한다.

바로 딱 3년만 죽었다 생각하고 참는 것이다. 제목만 보고 어떤 내용일까 기대를 했는데, 참으라니. 그것도 3년이나. 허탈했지만 이내 이해했다. 그래, 그런 묘수가 있을 리가 없지.


그녀는 말한다.

"아이가 세 돌이 될 때까지 이어지는 육아 과정은 ‘나’라는 사람이 죽고 ‘oo엄마’라는 사람이 태어나는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밤잠을 설치며 수시로 깨는 아이를 달래고, 젖 먹이고, 빨래며 청소를 하느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직장에서는 ‘그럴 거면 집에 가서 애나 보지’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하지요. 그러나 엄마 자신의 욕구를 완전히 제쳐 놓고 아이만을 위해 사는 시기는 3년이면 끝납니다. 아무리 늦어도 3년만 지나면 아이는 스스로 작은 일상들을 처리해 나갑니다. 3년만 죽었다고 생각하고 견뎌 내세요."

    

뭐, 3년만 참으라는 말은 워킹맘에 한정해서 생각할 건 아니고, 홀로 아이를 키우느라 힘들어하는 여성이나, 전업주부(이 말을 쓰기 싫었는데 대체할 만한 말이 없다)라서 힘들어하는 여성들에게도 위안이 되는 말일 것 같다. 왠지 ‘3년’이라는 구체적인 기한을 정해놓으니까, 참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도 생긴다.(물론 그 의지가 매번 몇 시간 만에 꺾이긴 하지만)


작가 임경선의 에세이 『자유로울 것』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는 딸아이가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시간을 쪼개 글을 썼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워밍업을 한답시고 뜸 들일 여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아이를 보내놓고 몸을 휙 돌리면 그때부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겨우 시간을 맞추곤 했다. 작업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가사 노동은 모두 저녁 시간으로 미루었다. 바깥에서 점심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웬만해선 약속도 잡지 않았다. 아이가 옆에 없는, 혼자 있는 시간은 어떻게든 온전히 글쓰기에 투입되었다. 그 시간 동안 내내 집중해서 일했던 터라 아이가 귀가하면 이미 한차례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적지 않은 숫자의 여성 작가들이 왜 한동안 책을 뜸하게 내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가 있다는 것은, 이렇게 글 쓰는 일에 있어서 분명히 득 보다 실이 크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 힘들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특히 호흡이 긴 장편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그야말로 영혼이 반쯤은 나간 상태에서 아이를 돌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감이 되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유명인의 이런 솔직한 고백은 상당한 위안이 된다. 나보다 훨씬 단단하고 강해 보이는 그녀가, 그래서 육아 따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 것 같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니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오늘도 아침부터 징징거리는 아이를 안고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다짐한다.


"3년 만 버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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