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
*작성일 : 2025년 2월 9일
병들어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고뇌와 번민을 아주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기에
갑작스럽게 내려진 육체적 종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심지어 주변 사람들의 기만적 행동에 더 큰 회의감을 느끼기도 한다.
누구든 그 육체적 기능이 언젠가는 종료될 텐데,
내가 세상이 중심인양, 그 세상을 구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사는 게 맞는가?
반대로 생각해 보면,
주어진 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 수순이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과정 속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다.
그러면 훗날의 종말이 다가왔을 때,
절대자에 대한 원망이나 후회 없이, 겸허하게 그렇지만 만족스럽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죽음으로 인해 각자의 머릿속에는 직장 내의 인사이동과 가능할 법한 변화에 관한 생각만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지인의 죽음 자체는 늘 그렇듯 부고를 접한 모두에게 내가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 9 페이지
이 책은 일리치의 죽음을 먼저 보여주고, 그다음 그의 일대기를 서사한다. 그의 장례식에서 나타나는 가족들과 주변인들의 반응과 대화는 다소 냉소적으로 느껴진다. 고인의 죽음에 대한 진심 어린 슬픔과 존중보다는, 그의 부존재로 인한 나의 승진이나 유산 분배가 더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일리치가 일생이 궁금해졌다.
결국 이반 일리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결혼 생활, 적어도 자기 아내와 함께 하는 결혼 생활이 유쾌하고 품격 있는 삶을 항상 보장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종종 파괴함을, 따라서 이런 파괴로부터 자신을 꼭 지켜야 함을 깨달았다. 이반 일리치는 그 수단을 모색했다.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브나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업무였다. 결국 이반 일리치는 업무와 그 의무를 무기 삼아서 자기만의 독립적인 세계를 쌓고 아내에게 대항했다. – 29 페이지
이반 일리치는 사회적을 성공한 법조인이었고, 누구보다 아름답고 품격 있는 아내와 결혼했다. 그러나 실제 결혼생활을 순탄치 않았고, 이상은 현실과 그 괴리가 점점 커져갔다. 따라서 아내가 감히 관여하거나 침범할 수 없는 곳으로 점점 눈길을 돌린다. 그것은 업무 그리고 카드게임이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주어진 일과 상관없이 회사에 오래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야근 수당을 따로 주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해서 뭔가 씁쓸하다.
남편과 아내와 딸이 지인들 무리를 바라보는 관점은 완전히 일치했다. 벽마다 일본 접시가 걸린 거실로 몰려와서 다정한 척하는 온갖 친구와 친척 들, 특히 꾀죄죄한 자들이라면 다들 똑같이, 말을 맞출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내쳤다. 이런 구질구질한 친구들은 곧 발길을 끊었고, 골로빈 집안에는 가장 훌륭한 사교계 인사만이 남았다. – 43 페이지
일리치는 승승장구하며 좋은 집으로 이사를 했고, 그곳은 곧 사교모임의 중심이 된다. 이 집, 특히 잘 꾸며 놓은 거실은 그의 사회적 성공에 대한 열망을 잘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또한 그런 면모를 보여주며, 다소 가식적이면서 세속적이다. 이러한 모습은 훗날 일리치가 병들어 더 이상 가족들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권위를 보일 수 없을 때, 그 자신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게 된다.
모든 것이 항상 그랬던 대로 진행되었다. 순서를 기다리는 것도, 법정에서 그 자신이 그러했기에 익히 아는 짐짓 근엄한 척하는 의사의 태도도, 여기저기 두드려 보고 환자의 말을 경청하는 것도, 미리 정해져 있기에 굳이 답할 필요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그저 우리한테 맡겨 주면 모두 알아서 처리하리라고, 모든 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확실히 잘 안다고, 치료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똑같이 대한다고 주장하는 의미심장한 표정도 말이다. – 46 페이지
일리치는 재판장의 입장에서의 재판의 과정과 의사 입장에서의 진단이 과정이 같음을 인지하게 된다. 그 지루하고 반복적인 매뉴얼과 시스템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환자 입장의 자신의 처지가 더 안타깝게 느껴질 것 같다.
그는 이런 의식과 더불어 육체적 통증과 공포까지 끌어안은 채 침대에 누워야 했고, 밤에도 너무 아파서 좀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아침이면 다시 일어나서 옷을 차려입고, 법원에 가고, 말을 하고, 서류를 썼다. 혹여 출근하지 않으면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 집에 틀어박힌 채 매시간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그는 자기를 이해하고 동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파멸의 벼랑에서 홀로 살아야 했다. – 54 페이지
서서히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공한 재판관, 유망한 사교계 인사, 인정받는 가장으로 살던 그였지만, 결국 갑작스럽게 찾아온 질병으로 인해 그의 유리성 같이 빛나던 인생이 점점 금이 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묘사되는 모든 내용은, 병세의 악화와 그 속에서의 일리치의 정신적 혼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도 언젠가는 몸의 여러 기능이 점점 약화되고 쇠퇴하며 늙어갈 텐데, 그 체험을 미리 해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내와 아들딸, 하인과 지인과 의사 들, 무엇보다 그 스스로 깨달은 점이 있는데 바로 그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란 결국 오직 그가 언제 자리를 비워 줄지, 그의 존재로 인한 저 억압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언제 해방될지, 또 그가 언제 저 고통에서 놓여날지에 쏠려 있다는 것이었다. – 68 페이지
지병이 있는 상태에서 이를 간병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물론 가족에 대한 사랑과 존경으로 인해 그것을 마땅히 해야 함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예전에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신 친할아버지를 간병하시는 것을 봤을 때, 이게 여간 힘들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과정이 힘들고 고생스럽더라도, 빨리 죽기를 바라는 듯한 태도와 모습은, 아픈 이에게 있어 인생 전체에 대한 회의감을 안겨줄 것이다. 결국 살겠다는 의지와 신념이 진정으로 살고자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에, 아직 나의 존재가 중요하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아야 비로소 더 오래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자기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죽어 간다는 이 무섭고 끔찍한 사건을 어쩌다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로, 일정 부분 점잖지 못한 일의 수준으로(마치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거실로 들어오는 사람을 대하듯) 격하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한평생 모셔 온 ‘품위’라는 것이었다. – 73 페이지
점점 정신이 피폐해지고 있는 일리치의 심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병상에 눕기 전에는 누구보다 품위 있고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병듦과 죽음에는 그 품위가 전혀 실려 있지 않다. 결국 그가 그리도 극진히 모셨던 그리고 숭배했던 품위는, 그의 사회적 배경과 훈장들에 의한 것이지, 그 사람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리를 내려놓고 뒤 팔을 베고 옆으로 눕는데, 그는 자신이 가여웠다. 그는 게라심이 옆방으로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더 이상 자제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의지할 데 없는 처지와 끔찍한 고독과, 사람들과 하느님의 잔혹함과, 하느님의 부재에 목 놓아 울었다. -87 페이지
안타까운 장면이다. 인간이란 참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임이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모두 내가 중심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영웅인 것처럼 살아간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성취할수록 그런 생각은 더 딱딱하게 굳어진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고 덧없다. 이는 미국의 대통령이든 케냐의 원주민이든 모두 똑같다.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고, 앞으로의 인생의 방향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이었다.
“끝났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끝난 건 죽음이야.’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것은 더 이상 없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한중간에 그대로 멈추더니 몸을 쭉 뻗은 채 죽었다. – 103 페이지
여기서의 ‘끝났다’라는 의미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의문 그리고 배신감에서 벗어났다는 말로 이해했다. 죽음 직전까지 계속 자신을 괴롭히던 많은 감정들로부터 일순간 해제되며, 그 혼돈 속에서 영원히 해방된 것이다. 결국 온전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12살 때 처음 죽음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이며 매우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물어보니, ‘죽기 싫다, 엄마와 영원히 떨어지기 싫다’며 2박 3일 동안 엄마만 따라다녔다고 한다.
이번 기회를 통해 죽음과 그에 도달하는 과정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의 행동과 책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죽음이란 나에게 있어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고 그렇다고 부정적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행복, 성취, 학습, 성장 등과 같이 삶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축이라고 생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