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사강
*작성일 : 2025년 7월 20일
요즘 제주도 출장이 많아 대부분의 시간을 제주도에서 보내고 있다.
그만큼 제주의 지리와 지명이 익숙해지고 있고,
체감되는 섬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다.
하루는 업무 중 빈 시간이 생겨,
회사 선배의 추천으로 ‘시인의 집’이라는 함덕의 한 카페를 갔다.
바로 앞에 바닷가가 보이는 책방 겸 카페로,
가게를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책들과 책 관련 굿즈들이 나를 반겼다.
거시서 사온 책이 이 패배의 신호이다.
예전에 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같이,
사회적 규제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묘사하고 표현하는 사강의 이야기는,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래서요?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으면서 누군가가 마음에 드는 건 정말로 불가능한 건가요? 난 결코 평화로울 수 없는 걸까요? 이게 대체 무슨 법이죠? 그래서 당신은 무슨 자유를 누렸는데요? 그러니까 무슨… - 68 페이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여러 번 읽어본 부분이다. 루실의 솔직한 심정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다.
일반적인 연인사이라 함은 1대 1의 대등한 관계이며, 지금 사람과의 사회적 계약은 다른 사람과의 이성적 관계를 통제하는 암묵적 책임이 발생한다. 우리가 연인 관계를 시작할 때 어떤 명문화된 계약서를 쓰는 것도 아니고, 하늘을 바라보며 선서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게 맞다고 어렸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과 주위 환경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웠다.
어쩌면 이런 사회적 계약은 동양적 사고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연인이 자주 바뀌거나 그 사랑의 진도가 다소 빠른 사람들을 보고 ‘미국식’이라고 말하곤 한다. 사회적 의무와 책임보다는 나 자신과 상대와의 관계, 이 둘에 더 집중한 사고방식은 동양보다는 서양에서 더 자연스럽게 받아 드려 지는 것 같다.
이런 서양적 사랑의 개념을 가지고 다시 이 구절을 읽어보면, 루실의 심정이 갑자기 이해가 되기도 한다. 샤를과의 사랑도 사랑이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앙투안과의 사랑도 분명 사랑이다. 한 사람이 지긋지긋하게 싫고 밉거나 떠나고 싶지 않고, 서로 다른 두 사랑이 공존할 뿐이다.
가수 다비치의 ‘두 사람’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두 사람 모두를 사랑한다는 가사가, 당시 곡이 발표된 이후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강의 책들을 보면 여러 가지 이성적 사랑의 병행이 굉장히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억눌렀던 감정들이 그 빛을 다시 발하는 느낌이 든다.
(아, 물론 나는 지극히 동양적이고 보수적인 사람이며 질투의 화신이다.)
루실은 말을 멈췄다. 그녀는 파리에 올라와, 엄마에게 매달 힘겹게 돈을 보냈었다. 2년 전부터는 샤를이 그녀에게 따로 알리지 않고 돈을 보내고 있었다. – 127 페이지
뭔가 복선처럼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결국 루실은 가난하지만 젊음을 가진 여성이었고, 샤를이라는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현재 앙투안과의 불 같은 사랑은 결국 그 온도가 점차 식어감에 따라 다시 돈의 논리가 적용될 것이다.
샤를과의 안정적이지만 건조한 사랑을 할지, 앙투안과의 불 같지만 위험천만한 사랑을 할지, 루실은 결정해야 한다. 일단 두 사람 모두 질투심과 소유욕의 남자들이기에 둘 다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경우 대부분 후자를 선택하고 후회한다. 결국 마음 가는 대는 결정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수없이 많은 샘플 케이스들이 존재한다. 어느 쪽의 결정이 덜 후회스럽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후자의 리스크가 훨씬 작기 때문이다. 특히 어리면 어릴수록 더 그런 경향이 있다.
그녀는 그가 낮에는 이토록 무사태평하고 몽상적이며, 밤에는 그토록 거칠고 정확한 것이 좋았다. 마치 사랑이 그의 안에서 잠자던, 오직 쾌락만이 확고 불변의 유일한 법칙인 무사태평한 이교도를 깨운 것처럼. – 129 페이지
표현이 멋져서 가져온 대목이다. 앙투안의 매력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자, 이를 상당히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평소에는 태평하고 큰 감정 변화가 없는 그였지만, 그녀와 사랑을 나눌 때만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그였다.>라는 문장을 이교도라는 표현을 통해 화려하게 만들어 낸 것이다.
뮤지컬 노트르담드파리의 이교도들의 과격한 동작들이 떠올랐다. 가톨릭 성당의 벽을 타 올라가고 그 종교를 무너뜨리기 위한 이들의 과격한 동작과 춤사위를 생각하니, 앙투안의 모습이 더 극적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좋은 관계를 맺고, 모르는 사람들끼리 애정을 키우는 건, 돈 많은 사람들의 집이나 밀폐된 술집이나 혁명 기지에서 위스키 잔을 기울이면서 해야 할 일 아니냐고.’ 동시에 루실은 절망적으로 실은 그 반대라는 걸 입증하고 싶었다. – 199 페이지
앙투안과의 열정적 사랑의 온도가 식으며 현실의 차가움이 빠르게 찾아왔다. 루실은 샤를과의 동거생활에서는 전혀 일하지 않고 그냥 놀고먹기만 하며 ‘존재’만 하는 삶을 살아왔다. 충분히 그래도 됐고, 샤를은 그 모든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방 한 칸에서 모든 생활을 해야 하고 집을 치우고 음식을 하고 심지어 돈까지 벌어야 살아갈 수 있다.
오픈카를 타고 파리 전역을 달리던 루실이, 30분을 기다려야 탈 수 있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허무함이 밀려오는 이 대목이, 읽는 이로 하여금 다소 통쾌한 기분을 들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샤를 대신 앙투안을 선택한 그녀를 질타하는 것은 아니다. 나라도 그렇게 선택했을 테니.
체면, 모든 책임이 이 체면에 있다. 이미 얼마 전에 나는 깨달았다. 무위야말로 우리의 모든 미덕과 그나마 참아줄 수 있는 우리의 모든 자질 – 명상, 한결같은 기분 유지, 게으름, 활발한 정신적, 육체적 소화력 – 을 드러낸다는 걸. 먹기, 배설하기, 육체관계 맺기, 햇볕을 쬐며 빈둥거리기. 이보다 더 나은 건 아무것도 없다. 이것과 비교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극히 일부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숨쉬기, 살아있기, 그것을 인지하기. 이보다 더 나은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 213 페이지
루실이 ‘야생 종려나무’라는 책에서 읽은 한 대목이다. 루실이라는 인간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면 바로 한 단어, ‘무위’가 아닌가 싶다.
앙투안과 루실은 서로에게서 1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퇴각의 북소리’가 그들에게 더는 아무것도 상기시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클레르의 선언 또한 그들을 조금도 미친 듯 웃게 하진 못했다. – 257 페이지
앙투안과 루실의 사랑이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이 끝나버린 것 같다. 더 이상 어떤 요인도 그들에게 큰 자극으로 느껴지지 않고, 마찬가지로 어떤 유희도 그들을 웃게 만들지 않는다. 세 달간의 불같은 사랑, 그러나 책임 없는 사랑의 결말을 알게 된 순간 그들은 어른이 되어 버렸다.
프랑스 문화를 4년 이상 배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유로운 사랑의 관점은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되려 ‘그럴 수 있다’ 정도로 생각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현실이라는 단어와 어울릴 수 있는지,
사랑이라는 단어가 현실이라는 무게를 견뎌내야 하는지,
현실적인 사랑이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