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내내 기다렸던 따뜻한 봄이 시작되는 3월이다. 앙상했던 가로수 가지에 초록 새싹이 돋아나고, 새 학기를 맞이한 학생들의 씩씩한 발걸음이 적적했던 거리를 활기차게 만든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탕을 주며 마음을 전하는 달달한 화이트데이가 있어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한다.
3월 14일 화이트 데이는 유럽에서 역사적으로 유래된 밸런타인데이와 다르게 일본에서 사탕을 많이 팔기 위해 만들어낸 날이라고 한다. 이런 날을 마케팅 데이라 하는데 이때 판촉행사 알바 자리가 많다. 관련된 상품을 파는 회사들의 연매출 달성여부를 좌우할 정도로 큰 매출이
나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동네 슈퍼마켓에서 화이트데이 행사 판촉 알바를 했다. 이른 아침 개점 두 시간 전에 슈퍼마켓에 도착했다. 지정된 매대에 판매 매뉴얼 사진대로 사탕들을 진열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매뉴얼은 알바 일주일 전에 행사 담당자에게 받았다. 회사소개부터 판매할 제품설명, 가격, 상품 포장 방법, 복장규정 등이 상세히 적혀있었다. 판매 전에 손님들을 응대할 때 멘트와 상품 정보를 미리 숙지해야 하는데 판매할 사탕 종류가 많아서 꽤 헷갈렸다. 사탕을 진열하면서 이름이랑 상품 정보를 다시 한번 익혀두었다.
화이트데이 판촉 행사에서 주로 하는 일은 선물 포장이다. 평소 판매되는 상품과 똑같지만 화이트데이 한정 포장 봉투에 담아 리본을 매 주면 특별한 선물이 되는 것이다. 포장 봉투의 일부는 미리 포장해서 전시해 놓고, 나머지는 손님들이 고른 사탕들을 그 자리에서 포장해 드리기 위해 남겨두었다.
오전에 슈퍼는 장을 보는 아주머니들로 북적였지만 화이트데이 매대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셨다. 밸런타인 데이는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고, 화이트데이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사탕을 주는 날이라는 통념 때문인가 보다. 이것도 일본에서 시작된 마케팅으로 원래 밸런타인데이는 남녀 관계없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표현하는 날이라고 한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슈퍼마켓도 한가해졌다. 전시할 상품 포장에 집중하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드니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매대 앞에 서 있었다. 주머니에 꽂힌 명찰을 보니 근처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팔짱을 끼고 진열된 사탕들을 둘러보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둥근 양철통에 든 커피맛 사탕을 골랐다.
“화이트데이 포장해 드릴까요?”
“네. 감사합니다”
하던 포장을 옆으로 미뤄두고 새로운 포장 봉투를 꺼내며 빨간색과 보라색 리본을 보여주었다.
“어떤 색 리본으로 달아드릴까요?”
두 색깔의 리본을 번갈아 보며 잠시 망설이던 학생이 보라색 리본을 손으로 가리켰다.
“엄마가 보라색을 좋아하시거든요.”
학생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중학생 아들에게 사탕을 받고 기뻐하실 엄마를 생각하며 정성껏 포장해 주었다. 포장이 완성되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린 학생은 예쁘게 포장된 사탕을 받아 들고 살짝 미소를 짓더니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를 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비록 상술로 만들어진 화이트 데이지만 이날만큼은 용기를 내어 친구나 연인, 가족에게 평소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전할 수 있기에 매년 기억되는 기념일이 되었구나 싶다.
저녁이 되자 일을 마치고 오신 손님들로 정신없이 바빠졌다. 슈퍼마켓이 문 닫을 시간에는 미리 포장해 둔 사탕까지 거의 다 팔렸다. 진열대 곳곳에 빈자리를 보면서 오늘 하루 사탕을 사 간 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사탕을 받을 사람을 생각하며 무엇이 좋을지 고민하고, 포장을 기다리며 설레어했다.
마음을 표현하는데 값비싼 보석이 필요한 게 아니다. 화이트데이에 작은 사탕 하나라도 마음을 담아 준다면 그것이 최고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