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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님 Jul 10. 2019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 한대수 행복의 나라로 중에서




  20년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남편과 함께 희망리로 이주한 지 1년이다. 희망리에 들어올 때 오래된 집을 사서 정성껏 꾸몄다. 생각보다 손볼 곳이 많았지만, 지금은 고급 주택이 부럽지 않을 만큼 안락한 집이 되었다. 열일곱 평쯤 되는 본채에는 부엌 겸 거실, 침실과 공부방이 있고 손님을 위해 마련한 사랑채가 있다.

 

희망리에 오기 10년 전부터 좋은 땅과 집을 고르기 위해 남편과 함께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 계절마다 아름다운 옷을 갈아입는 희망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마을 중심으로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적당한 높이의 산이 어머니의 품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습에 홀린 듯 마음을 빼앗겼었다.

     

희망리에서는 시끄러운 알람 소리로, 덕지덕지 묻은 책임감 따위로 아침을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 알람 소리를 대신해 나를 깨우는 것은, 코끝을 간지럽히는 아침 햇살과 오묘해서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새들의 노랫소리다. 그리고 그보다 좋은 건 욕심으로 배가 터지기 직전인 사람들을 마주하며 억지로 웃어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희망리 사람들은 가진 것에 만족하며, 오직 자연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일과는 마루에 철퍼덕 앉아 날씨를 살피는 일로 시작된다. 냥이 들을 쓰다듬으며 한참 멍을 때리고, 뱃속의 허기를 느끼면 부엌에 가서 농사지은 감자며 호박으로 아침밥을 해 먹는다. 설거지를 하다 보면 부지런한 이웃집 할머니들이 찾아와 이름을 부른다. 빼꼼히 내다보면 할머니의 손에는 어김없이 먹거리가 잔뜩 들려 있다. 내용물은 철마다 바뀌는데 빨갛게 익은 앵두, 산에서 캔 더덕, 직접 담그신 백김치 등 하나같이 귀한 것들이다.

     

무언가 받을 때마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 하염없이 할머니의 늙은 손을 쪼물딱 거린다. 마른오징어보다 더 말라비틀어져 가는 할머니의 손은 그녀가 일생을 얼마나 고되게 살아왔는지 말해 주는 증거물이다. 그 고귀한 손 위에 내 손을 포개 올려놓고 있으면, 할머니의 일생이 흔들 다리를 타고 내게로 넘어오는 듯하여 가슴이 아득해진다.

     

희망리에서 내가 하는 일은 텃밭을 가꾸는 것이 전부다. 어제는 엄지손가락 마디만 했던 토마토가 밤사이 아기 주먹만 하게 자라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자연에 매번 경이로움과 감사함을 느낀다. 햇볕과 바람, 좋은 양분을 먹고 자란 작물들을 골고루 포장해 지인들에게 택배를 보내는 것 또한 작은 기쁨 중 하나이다. (농사일이 까짓 환상으로 될 일이냐 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걱정 마시라. 농부의 딸로 태어나  배추밭 꽤나 기어 봤으니 말이다.)

     



밭일을 마치면 마당에 있는 평상에 벌러덩 드러누워 라디오를 듣는다. 그리고

     

‘점심은 뭘 해 먹지? 삼겹살이나 구울까? 순이 할머니네 감은 언제 익으려나? 오늘 저녁에는 사랑채에 손님이 온다고 했는데…. 손님이 밤하늘의 쏟아질 듯한 별을 보면 참 좋아하겠구나’

     

따위의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생각을 한다.

     

우리 집 가장 큰 자랑인 사랑채는 지인이라면 누구나 머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다. 크기도 제법 커서 가족 단위로도 머물 수 있다. 어떤 이는 와서 온종일 방에 처박혀 얼굴이 호빵만 해지도록 잠만 자고, 또 어떤 이는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


사랑채에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온다. 그리고 지내는 동안 밭에서 나는 것들로 나와 함께 밥을 지어먹고, 머물고 싶은 만큼 지내다가 기운을 차리면 돌아간다. 그들이 사랑채에서 무엇을 하든 최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다만 그들이 듣는 사람을 필요로 할 땐 새하얀 새벽이 올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프게 한 이를 향해 못된 놈, 독한 년 진심을 담은 욕 화살을 날려준다. 지인들은 그런 우리 집을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저녁이면 아궁이에 환하게 불을 지펴 닭백숙을 오래도록 삶아 내놓는 외할머니댁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 사진출처 : 여행생활자 유성용 작가님 facebook

     

긴긴밤과 초승달, 햇빛, 바람, 구름, 꽃, 소쩍새 소리, 자유를 아는 고양이와 넘치는 먹거리…. 다 열거할 수 없는 모든 것이 있는 희망리. 끝없던 욕망이 멈추고 시간이 느리게 가는 곳, 타인에 대한 배려가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벼처럼 넘실거리고 뾰족한 이기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 목 놓아 울 수 있고 해바라기처럼 웃을 수 있는 곳, 상처 주는 이가 없고 상처 받는 이가 없는 곳, 마음이 가파른 절벽을 서성이지 않아도 되며 바람 따라 쉬면 그만인 곳.

이곳은 내가 그리는 행복의 나라다.

# 표지를 포함한 사진은 여행생활자 유성용 작가님의

   허락을 받아 올립니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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