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밍 May 08. 2024

케이크

소주보다 케이크 숙취가 더 심하답니다.



사실 손가락으로 세어보면 일 년에 케이크를 먹을 일이 많지는 않습니다.

물론 두루두루 모여 카페를 가는 경우 한 두 조각 정도 먹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입으로 들어오는 횟수는 케이크를 먹었다라고 말하기보단 케이크 맛을 봤다 요 정도쯤 되려나요,

그러다 보니  아, 그 초코 크림을 한 두 입 정도만 더 먹었더라면, 그 치즈 케이크를 하나 포장해 올걸 그랬나. 하는 아쉬운 위장을 달래며 집에 가는 길만 수차례였습니다.


그렇게 감질맛 만나게 케이크를 한 입만 먹다가도 왕창 먹을 수 있는 날이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이었네요.

이년에 한 번도 아니고 매년 시곗바늘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면 돌아오는 생일이지만 시곗바늘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걸어온 일 년을 수고했다는 마음으로 커다란 케이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예쁘게 포장된 케이크 박스를 보자마자 벌써 케이크 박스부터 한 입 먹은 듯 당분이 손끝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달콤한 과자집으로 향하던 헨젤과 그레텔이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포장된 케이크를 들고 집으로 가는 길의 풀냄새는 다디달고 보도블록은 더없이 퐁실퐁실하더군요.








집으로 돌아와 헐레벌떡 케이크 박스를 열고 포크로 생고기처럼 두툼하게 내리찍어 한 입 가득 넣은 케이크는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작년 이맘때부터 지금 이맘때까지 감질맛만 느꼈던 혀를 생크림에 절이듯 달달한 맛이 끝없이 회오리쳤습니다.

심심할까 틀어놓은 티브이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그런 건지 입에 퍼지는 생크림이 혓바닥을 통통 굴러다녀서 그런 건지 입에 들어갔다 나오는 포크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입가엔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렇게 케이크 반절을 먹었을까요, 맞습니다 평소보다 무리해서 먹은 거죠.

어느 순간부터 포크를 쥐고 있는 손가락에 힘이 빠지고 눈꺼풀 위로 생크림 구름이 내려앉은 듯 슬슬 무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힘이 빠진 손가락은 포크를 케이크 옆으로 슬며시 내려놓았고 반쯤 감긴 눈꺼풀은 겨우겨우 머리를 기댈 곳을 찾아 배부른 몸을 뉘이게 했습니다.


잠에 든 건 잠깐이었지만 아주 길고도 달콤한 꿈을 꾸었던 것 같습니다.

푹신푹신한 케이크 시트와 같은 소파에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 두루두루 둘러앉아 보드라운 생크림 이불을 덮고 바삭바삭한 초코쿠기 모자를 쓰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그런 꿈 말입니다.

펑펑 소리가 머리 위로 펼쳐지는 불꽃놀이 소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택배 기사님의 노크소리임을 아주 천천히 깨닫고 겨우겨우 눈을 떴습니다.


무거운 택배 박스를 받아 들고 나서도 눈꺼풀은 여전히 감겨있는 듯 비몽사몽이었습니다.

이 택배는 뭘까, 열어보니 이것도 케이크일까. 아 그렇다면 다시 불꽃놀이가 쏟아지는 파티가 다시 열리려나.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핑핑 돌면서 말이죠.

느릿느릿한 손짓으로 택배 박스를 열어보니 다행인지 그렇지 않은 건지 내용물은 케이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박스 테이프를 뜯어내고 박스를 하나하나 접어 치우면서도 달달한 향기는 어딘선가에서 계속 풍겨왔습니다.


대충 모자를 눌러쓰고 박스를 버리러 바깥에 나와 바람을 맞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취했구나 케이크에. 이 초록잎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마저 달달한 초코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나는 케이크에 취해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소주를 서너 병 먹고도 이렇게 숙취가 심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달달한 크림의 숙취는 무엇으로 해장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생각나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올라가기 전 벤치에 잠시 앉아있기로 했습니다.

그저 그렇게 달달한 숙취에 취해있기로 했습니다.

그리 나쁘지 않았거든요, 소주를 잔뜩 마시고 쓰린 속을 어루 달래야하 숙취보다 달달한 기분에 바람마저 부드러운 케이크 숙취가.

언제 또 이렇게 달달한 숙취를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시간이 약이라고 알아서 다디단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가장 좋은 숙취해소 방법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지금은 불어오는 바람에서 풀향기가 납니다.

더 이상 맡아지지 않는 달달한 초코쿠기 향이 아쉽지만 그럼에도 즐겁습니다.

여전히 시곗바늘에 걸리지 않고 발맞춰 움직이다 보면 그런 나를 또 응원해 줄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다시 케이크에 취할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