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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밍 May 15. 2024

팝콘

알면서도 굳이 굳이 하고 싶고 먹고 싶을 때가 한 번쯤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아이섀도에 마스카라까지 한껏 얼굴에 신경 쓰고 향한 곳이 동네 마트이거나, 원하지 않아도 옆사람의 향수 냄새를 코앞에서 맡을 수밖에 없는 혼잡한 지하철에서 꺼내지도 못할 책을 가방에 넣어가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굳이 하는 일쯤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영화를 보러 가서 팝콘을 사 먹는 일은.


영화관이 조명이 어두워지고 커다란 스크린에 영화사 로고가 하나둘씩 떠오르면 안타깝게도 팝콘을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습니다.

조용하게 이야기가 진행될 때 입안에서 바삭바삭 부서지는 팝콘소리에 스스로가 영화에 집중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처음엔 한두 개 입으로 들어가지만 양옆 스피커를 통해 웅장하게 전해오는 사운드에 저작운동을 멈추기 시작하는 입과 점점 몰아치는 배우들의 감정선에 입가 주변을 맴돌던 손가락은 힘을 잃고 허벅지로 향할 뿐이기 때문이죠.


그러다 영화가 끝나고 버려지는 팝콘이 한두 개도 아니고 하도 그러다 보니 한동안 영화관에 도착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상영관으로 바로 올라갔습니다.

매번 반도 먹지도 못할 팝콘을 굳이 영화 보면서 불편하게 들고 있을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상영시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조금 가쁘게 영화관에 도착하는 날에만 음료 하나를 사서 상영관에 들어가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 영화관을 가려고 현관문을 나선 순간, 문득 팝콘을 먹어야겠다는 강렬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일찍 일어난 덕에 아침도 챙겨 먹고 나서는 길이라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팝콘을 나눠먹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굳이 팝콘이 먹고 싶어 졌습니다.

영화관에 발을 들이면 풍기는 달달하고 고소한 팝콘 냄새에 오랜만에 먹어볼까, 생각은 몇 번하지만 결국 먹지 않고 상영관으로 향하는 게 당연한 걸음이었다 보니 오늘도 먹고 싶은 마음은 잠깐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이윽고 도착한 영화관에서 어김없이 풍겨오는 달달하고 고소한 냄새를 자연스럽게 지나쳐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곤 다시 걸음을 뒤로했습니다.

굳이, 정말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냄새부터 달달함으로 가득 찬 팝콘 큰 통을 하나 품에 안고 상영관을 찾아갔습니다.

에스컬레이터가 천천히 한 칸 한 칸 올라갈 때마다 입에다가 팝콘을 한 개 두 개 넣곤 우물우물, 분명 오늘 하늘이 두쪽 나도 이 팝콘을 다 먹을 순 없겠구나 싶으면서도 달달한 고소함이 입안에 맴도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드문드문 앉아있는 사람들을 배경 삼아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상영관에서 자리를 찾아 앉곤 본격적으로 팝콘을 입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바삭바삭, 입안에서 퍼지는 기분 좋은 소리가 영화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광고 소리보다 크게 들렸지만 그것 또한 그날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짧고도 긴 광고 시간이 지나고 조명이 보다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어김없이 팝콘으로 향하는 손가락은 서서히 느려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조명이 밝아졌을 땐 어김없이 반이상 그대로 남은 팝콘을 안아 들고 상영관을 나섰습니다.


반이상 남은 팝콘을 영화관 직원에게 건네주고 나오는 길이 여전히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날은 팝콘이 유독 달았습니다.

아무도 봐주는 사람 없어도 아이섀도에 마스카라까지 마트를 갔다 온 날과 결국 지하철에서는 꺼내지도 못한 책을 퇴근 후 집에 와 꺼내봤던 지난밤처럼,

나름 괜찮았습니다. 오히려 기분은 좋았습니다.

굳이 굳이 해냈구나,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다른 어떤 것들이 뭐라 하든. 손해 보는 일이든 그렇지 않든 아무런 상관없이. 이런 기분으로 말이죠.


반이 조금 안되었더라도 맛있게 먹었으면 되었다, 하며 어딘지 섭섭한 마음을 달래 보기로 했습니다.

조금 번거로움을 알면서도, 꽤나 쓸데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때론 지나치치 못하는 마음들이 있듯이,

팝콘의 달달하고 고소한 냄새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날도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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