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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밍 May 13. 2024

낙지볶음

슬프다면 낙지볶음 앞으로 가십시오.



역시 슬플 때는 낙지볶니다.

잔으로 떨어지는 눈물 한두 방울 섞인 술은 흘러넘치는 맹물처럼 맛이 없고 달달한 아이스크림으로 내려 누르기엔 목구멍까지 차오른 속상함은 꽤나 뜨끈하게 끓어오른 터라,

이렇게 슬플 때는 낙지볶음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분명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였음에도

오늘따라 바람이 머리를 너무 많이 헝크러트린다던지, 유달리 고요한 핸드폰이 숨은 쉬고 있나 싶다던지,

배달 어플을 살펴봐도 주문할 음식 하나 고르지 못하고 있다던지, 그런 별일 아닌 일이 별일이 되어 청승맞게 슬픈 하루에 말입니다.






다른 게 아니고, 조명을 켠 듯 선명한 붉은색이 두 눈에 가득 차고 매캐한 미세먼지와 함께 들이마셔 벌써부터 칼칼한 향기에 희뿌여진 시 한껏 뜨거운 김에 슬슬 휘젓던 젓가락에 묻은 양념만으로도 아릿한 혀.

윤기 나는 새하얀 흰밥 위로 한 스푼 두 스푼 떠서 그릇에 비비다 보면 밥그릇에  부딪히는 숟가락 소리도 우울한 오늘을 비웃듯 경쾌해집니다.


배터리가 다된 장난감 로봇처럼 맥없이 숟가락을 들고 밥알 하나 낙지다리 하나 깨작깨작대다보면 어느덧 매콤해진 밥알과 탱글한 낙지가 한 숟가락을 가득 채웁니다.


한 숟가락 가득 채워 입안으로 숟가락을 대여섯 번 넣다 보면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힙니다. 낮에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방울 마냥말입니다.

이마에 땀이 흐르려나 싶을쯤이되면 이제는 콧속으로 아까 미처  입 밖으로 뱉지 못한 속상함이 차오릅니다. 조금 참았다가 마지막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나서야 휴지를 서너 장 집어듭니다.


낮에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떨어지면 어쩌지 조마조마했던 눈물 같은 땀을 휴지로 이마를 가로질러 시원하게 닦아내고,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하고 억지로 혀아래에 숨겨둔 속상함을 모두 쏟아내듯 맹맹한 코를 개운하게 풀어주면 낙지볶음과의 식사는 비로소 끝이 납니다.


역시 슬플 때는 낙지볶음입니다.

참아온 눈물과 숨겨둔 속상함을 맛있게 매운 붉은색에 버무려 개운하게 삼켜낼 수 있는

이렇게 슬플 때는 낙지볶음만 한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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