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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밍 May 31. 2024

콩나물국밥

정착할 구석 하나쯤 가지는 건 꽤 든든한 일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자연스레 한잔할 생각이 떠오르게 된 지도 곧 십 년에 다다릅니다.

구수한 막걸리보다는 청량감 있는 맥주를, 맥주보단 깔끔한 소주를 마실 때가 제일 좋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걸 보아하니 그동안 채우고 비운 술잔이 헛되지는 않았나 봅니다. 저는 소주로 정착을 한 셈이니 말입니다.


언제 밤이 다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보낸 즐거운 술자리가 그다음 날까지도 이어지려면 한 군데 더 정착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해장을 해야 할 곳이죠.


이제 막 한 잔 두 잔 술을 먹기 시작했을 때는 달달한 초콜릿우유를 그렇게 많이 마셨던 것 같습니다.

초콜릿 맛이 진하면 진하고 향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술기운이 녹아내려 없어진다고 흐릿한 기억 속에 그런 ㄷ선배들의 조언이 남아있습니다.

사실 해장이 잘 되었던 건지는 흐릿하게도 남아있진 않습니다. 그저 알딸딸한 기분에 옹기종기 모여 초콜릿우유를 마시던 모습이 꽤 귀여웠구나 하는 몽글몽글한 기분만이 곱씹어집니다.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보다 회사 선임님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이 많았던 때에는 시원한 커피를 꼭 마셨던 것 같습니다.

아침에 회사를 가면서도 먹는 커피가 지겨웠을 법도 한데 업무 이야기를 두런두런하며 비운 술잔을 다 채우고도 남을 큰 사이즈의 커피를 마셔줘야 이제야 회사에서 퇴근한 개운한 기분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오랜만에 친척 어른들과 거하게 술잔을 비우고 채우고 정신없는 상태로 아침을 맞은 날이 있었습니다.

지난밤에 미리 사다둔 초콜릿우유도 없고 커피를 사러 가기엔 아직 카페가 문을 열기엔 이른 시간이라 어째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찰나, 고모부가 만히 손짓하셨습니다.








곧 다다른 곳은 콩나물국밥집이었습니다, 아침 장사로 이렇게 정신없는 콩나물국밥집은 처음이었죠.

그전까지는 초콜릿우유나 커피로 대신했던 해장이라 밥이랑 국물이 잘 넘어갈지 걱정이 앞섰지만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국물 한 수저 앞에서는 다 무용해졌습니다.


혀를 타고 넘어가며 식도부터 지난 밤동안 묵은 알코올 향기를 저 밑으로 내리는 맑은 국물, 자극적이었던 지난밤의 안주는 꿈이었듯 싱그럽게 아삭거리는 콩나물.

커피에 동동 띄워있는 얼음보다 든든한 풀어진 밥알까지.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 콩나물국밥으로 정착하겠구나 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기분이 좋아 술을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고민하지 않고 소주를 찾고, 한껏 신나게 들떴던 속을 달래기 위해 고민 없이 콩나물국밥을 찾는. 찰나의 고민도 어지러운 선택도 필요하지  않은 정착된 한 잔과 그다음 날.


선택하고 고민하는 일은 실로 즐거운 일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모든 순간을 고민하고 선택하기엔 조금 피곤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런 순간이 찾아오는 날, 괜히 든든한 기분이 들 수 있는 나만의 정착지가 있다는 건 콩나물국밥을 한 그릇 비우고 나서는 걸음처럼 꽤나 든든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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