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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숲 Aug 31. 2021

삶의 온기로 가득한 통영을 거닐다

낮에는 밥 짓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저녁에는 별이 잘 보이는 마을. 삶의 온기로 가득하고 사람들의 숨결이 담겨 있는 동네. 통영은 내가 떠올리는 마음의 안식처와 가장 닮은 곳이다.​


통영은 내가 사는 곳에서 너무 먼 곳이라 가는 데만 다섯 시간이 넘게 걸린다. 땅끝에서 다시 끝으로. 다섯 시간을 달리고 나서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삶의 중심을 잃고 흔들릴 때마다 380㎞를 마다하지 않고 덜컹거리는 버스에 오른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배낭을 든다. 어딘가에 몸과 마음을 편히 눕히기 위한 심정으로.​


노을이 지고 어둑한 실루엣이 포구와 마을 위로 내리고 있을 즈음 버스는 통영에 도착했다. 장엄한 노을의 마지막 순간이 산 아래로 사그라지고 있었다. 아직 여름의 열기가 머무는 대지 위에 시원하고 산뜻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손끝에 산과 바다의 숨결이 감미롭게 맴도는 듯했다.​


서피랑 마을에 있는 99계단을 단숨에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쉬지 않고 언덕을 올랐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정상에 도착하니 통영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깜깜하지만 차갑지 않았고 낯설었지만 정감이 느껴졌다. 물결 하나 없이 고요한 바다 표면을 달빛이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달을 위한 자리였던 것처럼.

서피랑 언덕에 있는 서포루에 털썩 앉았다. 고개를 들어 까만 하늘에 뿌려진 별들을 넋보고 바라보았다. 자꾸만 떠오르는 상념들을 지워 내기 위해 어둠 속으로 나를 내몰았다. 어떤 연고도 추억도 없으면서 정을 주다 보니 정말로 정이 들어 버린 이곳에 나를 내맡겼다.​


그렇게 한참을 어둠에 기대어 가만히 있었다. 밤공기가 내 안에 머물다 나갈 때마다 점점 안정을 찾았다. 언덕을 내려오는 골목길에는 어르신들이 쓴 시가 전시되어 있었다. 시에는 어르신들의 세월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아픈 영감을 보러 가기 위해 병원을 찾는데 그럴 때마다 당신의 마음도 아프시다는 할머니’, ‘젊은 시절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강냉이를 팔며 세월을 살아 냈는데 어느새 별명이 강냉이가 되었다는 할머니’, ‘언젠가부터 눈이 흐릿하게 보이는데 아무래도 모진 고생을 하느라 못 볼 꼴을 보아서 그런 것 같다며 젊은 날을 회고하는 할머니’…….​


서툴고 투박한 글씨체로 써 내려간 짧은 시에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당신만의 삶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시가 들어 있는 액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쉽게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어느 틈에 나를 따라왔는지 환한 달이 액자를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시를 쓰신 할머니들도 평온한 밤을 보내시길.​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나도 언젠가 세월을 타고 인생이 노년기에 이르렀을 때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어떻게 늙어 가게 될까.' 시에서 만난 할머니처럼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 훗날 내 생을 글로 쓰기 위해 여태껏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힘겹고 외로운 기억보다 애틋한 추억이 더 많았으면 했다. 부디 지금보다 더 솔직하고 욕심 없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랐다.​


삶의 숨결이 깃든 통영의 밤을 한참 더 걸었다. 어느새 자정이 되었는데도 거리는 참 밝았다.​


- 글에 나온 할머니의 시는 ‘박경리 학교 어르신 작품전’에서 본 이복순 님 「영감」, 이정숙 님 「별명」, 조순연 님 「눈 수술 받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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