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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당호수 나동선 Oct 01. 2021

삼팔광땅의 추억


        그대는 삼팔광땅을 아는가?  그것은 화투판의 지존이고, 인생 최고의 희열이다. 그걸 잡는 순간 그의  가슴은 두군거리고 손은 바르르 떨린다.  깊은 심호흡도 천장을 보는 것도 평온한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이 판에서 세상은 모두 그의 것이 된다. "모두 물렀거라! 나랏님 나가신다. 내 행차 앞엔 누구든지 머리를 조아려라! 나와 대적했던 자들은 자기가 가진 패를 모두 보여라!  지레 겁먹고  먼저 나가 자빠진 자들도 내가 가진 패를 똑똑히 확인하라!  그리고 내게 마음 껏 축하하고 조공을 바쳐라." 하며 소리없는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  두장 보기 화투판에서 삼팔광땅을 잡는 다는 것 ! 단 한 번이라도 그 환희에 빠져보지 않은 자는 사족을 달지마라!  낙시찌가 수면 아래로 들어간다. 그 순간 낙시대를 낙아챈다. 월척이다. 손가락 마디 마디며 손바닥에 전달되는 그 전율 그 짜릿함을 맛본 적 없는 자! 삼팔광땅의 짜릿함을 언급조차하지 말라.     


         누구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더 친숙하게 지낸 친구나 동료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도 그 들과 퇴근 후에는 소줏집에 더 자주갔고,  휴일이면 청계산이나 관악산 등으로 등산을 다니곤 했다. 등산 후 닭이나 오리 요리집에서 소주와 함께 한 늦은 점심은 언제나 꿀맛이었다. 식사 후 누군가가 화투장를 펴면 서로 둘러앉아 두장 보기 화투놀이를 했다.


         고돌이 화투판은 열 명이 동시에 함께 할 수 없다. 몇 명은 구경꾼이 되던지 판을 둘로 나눠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열 명이 한 판에서 즐길 수 있는 두 장 보기 '섯다'를 했다. 누군가가 화투 순서에 따라  이 판의 지존인 삼팔광땅을 가장 먼저 크게 그려놓고, 그 아래에 10땅부터 1땅까지, 다시 그 아래에 10끗부터 1끗까지 순위표를 그려 놓았다.


        오너가 먼저 바닥에 천원짜리 지폐 한장을 놓는다. 그러면서 누구나 천원 한 장씩 판돈을 내라고 독촉하니 바닥에는 벌써 열장 만원이 쌓였다. 바닥 돈을 확인한 오너는 흥얼거리며 각자에게 두 장씩 화투를 돌린다. 이 경우에는 열사람 모두 선수요 참가자인 것이다. 참괌자란 없다. 누구를 훈수하고 참견할 겨를도 없다. 일 순간 너도 나도 자기 패를 든다. 누구나 긴장되고 약간은 상기된 모습들이다. 부르르 손을 떠는자, 가벼운 기침을 하는자, 자기 패보다 먼저 상대 표정을 읽는자, 각기 개성을 관파할 찰나는 지금이 최적이다.  각자는 머릿속에 순위표를 그린다.  자기 표를 확인한 순간 어떤 이는 회심의 미소를, 어떤 이는 몸짓이나 얼굴에 실망감을 나타낸다. 이때 얼굴이나 몸짓은 각자 마음의 축소판이다. 각기 짓는 그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전광석화 같이  먼저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는 마음껏 떠들고 즐기며 박장대소한다.


        한 바탕 웃고나면  빛의 속도로 빠른 순간에  상대패를 판단해야 한다.  그런 후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신속히 진퇴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자신이 든 두 장의 끗발이 상대보다 아래라고 판단되면 패를 바닥에 내려놓고 빨리 죽어야 한다. 그래야 판돈 천원 외에 더 이상 잃지 않게 된다.  반대로 내 패가 상위급은 아니더라도, 상대 패보다 높다는  확신이 서면 바닥에 천원 한 장을 더 내고 호기있게 고(go)를 부른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맨 처음 고를 부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2차, 3차, 4차...로 고를 부르며 따라가는 자들의 표정이나 제스처를 잘 관찰해야 한다.


        별로 안 좋은 패를 들고 허세를 부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높은  패를 들고 자신있어 하는지를  빨리 알아내야 한다. 내가 정말 좋은 패를 들고 있다면 '패는 별로지만 한번 연습삼아 섰다'는 등 상대가 돈을 더 걸도록 유도를 해야 한다. 돈을 많이 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천원 한 장 씩을 추가로 내며 자발적으로 참여케 유인할 줄 아는  스킬이 필수다. 누구든 고를 부를 때 마다 연막(shield)을 잘 처서 더 많은 사람이 참여케 유도해서 판돈을 키워야 한다. 판을 키워 큰 돈을 딸 수 있는 것도 고를 부르는 자의 장기요 능력이다. 어느새 화투판은 세상의 모든 술수가 다 섞여서  녹아내린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뚜껑추가 짤랑짤랑 거리고 뜨거운 김이 푹푹 소리내며 나올 때 압력밥솥은 그 기압이 최고조에 달한다. 지금 이 순간의 분위기가 바로 그 숨막히는 타이밍이다.


        각자 내 패가 더 높다는 판단이 서면 천원 한장 씩을 추가로 판돈으로 낸다.  판돈은 어느덧 두 배 가까이로 된다. 이 쯤에서도 돈을 딸 수 있는 자신이 없으면 슬그머니 패를 보이고 들어가면 된다. 그래야 돈을  더 이상 잃지 않는현명한 행동이다. 마지막 까지 숙고하며 고심했던 자가 떠블고를 외치기라도 할라치면 판돈은 금새 두배의 두배 즉 처음 판돈의 네배가 된다.  계속해서 고를 부르면 판돈이 너무 커질 수도 있으니 세 번 정도로 제한을 한다. 마지막 세번까지 고를 부르거나 따라간 자들은 자기패를 보여주며 판돈 싹쓸이로 돈을 모아갈 전율을 느낀다. 최고패라고 생각했던 자가 손을 내밀어 판돈 싹쓸이를 시도하면서  마지막 남은 자에게  '빨리 표를 까'하고 재촉한다.  


        이 순간 맨 마지막까지 패를 쥐고있던 자가 너무도 점잖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그대로 멈추지 못할까!'를 연발하며 살포시 삼팔광땅을 내보인다. 그 순간 승패는 갈라지고 절망과 환희의 순간은 절정에 달한다. 차점자는 너무나 겸연쩍은 표정으로 돈 쓸어가려던 손을 거두어 들이며 아씨...아씨를 연발한다. 그대여! 끗발에 밀려 손을 거두어 들이는 자의 그 표정이 상상이 되는가?  삼팔광땅을 든자는 판돈 챙기랴, 참여자 모두로부터 축하금 천원 씩 더 받으랴 정신 못차린다. 분위기는 축제요 찬사받고 축하받기 바쁘다.  생각해 보라. 판돈 전부에 특별상금으로 나머지 아홉 명으로부터 처음 걸었던 판돈 만큼 추가해서 받게 눌(rule)을 정해놨으니 누가 그 삼팔광땅의 추억을 잊는단 말인가? 한번에 딴 돈이 4~5만원은 거뜬이 된다.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결국에는 '마지막 더 세 판'을 외친다.  


        어느덧 인생의 한 바퀴를 돌고도 몇 해가 지나버렸다. 삼팔광땅을 외쳤던 친구나 동료들이 지금은 어느덧 고인이 된 분들도 여러명 있다. 그나마 남은 자들도 추수 끝난 벌판의 허수아비가 된지 오래다. 모두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세상풍파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새 봄도 오기전에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신세로 변해 버렸고, 그 삶의 모습들은 누구나 오십보 백보요 도찐개찐이다.


        나는 오늘 하남 한강 둑방에서 검단산을 바라본다.  그 시절의 화투판을  또 다시 그리면서...... 돌려 사방을 둘러 봤다.  그순간 한강하구가 있는 서쪽 하늘로 열 마리의 두루미들이 훨훨 날아가고 있다.  그 순간 내손엔  한 마리의 학이 잡힌 것 같다. 나는 마지막 이 한 마리의 학을 놓을 수가 없다.  삼팔광땅 그 시절은 너무 멀고 그리운 추억이 되어버렸다.  바람결에 스친 듯 부지불식간에 꿈같던 세월은 그렇게 가고 말았다.  화투판의 유비 형님도 장비 동생도 내 곁에 안보인지 벌써 오래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마지막 더 세 판'을 외치고 있다. 그 날들의 웃음 소리는 귓청을 맴돌고  뇌리 속엔 삼팔광땅이  어른거린다.  그 판을 언제 다시 펼칠 때가 있을까?  꿈이 없으면 희망도 없다던데......  그 시절의 그들이 그립고 또 그립다. 갑자기 한장의 필름이 눈앞을 스쳐간다.  그건 옛날의 환영이었다.  아, 삼팔광땅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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