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한 갈래의 세계를 믿기로 결정하기까지 지지부진한 고통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형성되는 것이다.
진실이란 것을 믿기로 하다 추락한 시체로 형상화되는 사건이 파헤쳐질수록 가만히 듣기 거북한 낯뜨거운 사생활까지 드러난다. 꽁꽁 숨겨져 있어야 할 내밀한 기억의 조각들이 대중 앞에 발가벗겨져 보인다. 그러나 그 내밀함이 샅샅이 해부된 다음에도 남는 것은 서로 다른 믿음일 뿐 명확한 진실은 요원해져 간다. 결국 관객들은 끝내 두 갈래의 믿음 가운데 하나를 부여잡고 그것을 '진실'이라 불러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세상사 모든 사건의 진실이 그렇다. 관객과 독자는 영화와 책에 끊임없이 관여하고 해석하며 그 일부가 된다. 유명인들의 스캔들과 불가사의한 사건들, 사소한 일상적 문제들의 뒤에 숨은 진실 또한 사건의 총체 가운데 일부 조각들이 모여 떠받드는 한 갈래의 믿음에 불과하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화제가 된 사건이 발생했고 각자의 결론을 믿기로 한 점만이 중요하다.
한편 그런 믿음을 결정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럽기도 하다. 부모의 적나라한 갈등을 듣고 받아들인 뒤 하나의 결론을 믿어야 했던 아들의 고뇌는 세상의 진실을 찾아가는 인간의 고통과 다름없다. 그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자신의 믿음에 개연성을 가미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덧대게 되고,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청자가 믿는 진실의 토대로 쓰이게 된다.
그렇게성장해나간다 아빠의 실수로 인한 사고로 시력을 잃은 소년이 아빠의 죽음을 목격하는 데서, 영화는 시작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년은 아빠가 재생시키는 시끄러운 음악이 엄마와 손님에게 미치는 영향과 미묘한 분위기를 포착하지 못한 채 산책을 나선다. 돌아오는 길 집 앞에서 아빠의 시체를 발견한다.
소년의 피아노 연주는 굉장히 서투르다. 그 서투르고 듣기 거북한 연주를 배경음악 삼아, 부부의 어린 시절부터 부부의 만남, 소년의 탄생과 성장까지 사진의 몽타주로 제시된다. 피아노 위를 아장아장 걷는 소년은 아직 부모의 품을 벗어날 수 없다.
소년은 또 같은 곡을 계속 연습 중이다. 엄마가 오더니 서정적인 선율을 함께 연주하기를 말 없이 권유하며 아빠를 잃은 슬픔을 애도하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준다.
세월이 지나 엄마는 살인 혐의를 받아 기소되고 재판이 시작된다. 함께 슬퍼하던 엄마가 실은 아빠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충격을 받고, 소년은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서야 한다. 법무부 직원이 집에 찾아와 피고인인 엄마가 증인인 소년에게 재판에 관한 언급을 할 수 없도록 차단한다.
소년에겐 법정에 앉아있는 것이 버겁다. 화목한 부부인 줄 알았던 부모 사이에는 가장 깊은 갈등이 숨어 있었다. 재판부는 소년의 정서 문제로 인해 방청하지 못하도록 막지만, 소년은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것이라면 지금 당장 직시하겠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가장 큰 상처가 될 부모의 반목을 당장 마주하겠다고 나선다. 그렇게 소년은 엄마의 외도, 표절 의혹, 아빠의 자격지심, 자살 시도, 아들에 대한 부채감을 낱낱이 듣고 받아들여야 했다. 어린 나이에 겪게 된 그 고통과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한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소년은 3일 뒤 증인신문기일 전까지 엄마와 분리되어 있겠다고 선언한다. 아빠가 자살을 시도했던 날 약을 먹게 된 강아지에게, 그 똑같은 약을 먹이곤 강아지가 동일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소년은 자신의 길잡이가 되어준 강아지가 죽을지도 모르면서도 진실을 알아내고자 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아빠는 죽었고, 엄마와는 떨어져서, 강아지까지 잃을 수 있는 모험을 시도했다. 더 이상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지 않고, 직접 진실을 찾아나서기로 결심했다. 직접 세상과 마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소년은 이제 서투르게 연주하던 곡을 비교적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빠의 자살 시도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알게 된 소년은 혼란과 울분에 휩싸인다. 직원에게 도움을 청한다. 사회와 세상을 대변하는 인물에게 진실을 내놓으라 소리친다. 그러나 선택을 해야 할 땐 일단 하나의 선택지를 믿고, 그 다음 이해하라는 대답을 들을 뿐이다.
마침내 증인으로 나선 소년은 자신의 실험과 그 결과로 알게 된 아빠의 자살 시도에 관한 개연성을 진술한다. 그 다음으로는, 아빠가 강아지에 관하여, 언젠가 강아지가 떠날 수도 있으며 그 강아지는 유능했고 최선을 다했다는 점과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말한 적이 있다고 자신의 표현으로 진술한다. 영화에서는 삽입된 회상 장면 속 아버지가 입을 움직이지만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일관된 믿음을 우뚝 법정에 세운 소년을 비추는 카메라는 좌우를 오가며 양쪽에서 보내는 의심과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빠가 진정으로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소년은 도통 이해할 수 없던 갈등과 혼란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믿기로 결심한 한 갈래의 세상을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빠의 감정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던 소년에겐 자신의 마지막 증언이 실존했던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믿고 이해한 세상, 그가 받아들이게 된 부모의 관계와 아빠의 자신에 대한 사랑에 의하면, 아빠가 했다는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도 아빠라는 사람의 마음에 분명 존재했던 진실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소년이 세상과 부딪쳐 가며 삶을 이해하게 되었던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떠오른다. 결국 소년들은 누군가에 의해 세상을 배우지 않았고, 자신들이 믿고 형성할 진실을 스스로 결정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소년은 사람의 악의를 인정하되 우정과 너그러움이 힘을 발휘하는 세상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또 이 영화 속 소년은 갈등을 견디지 못한 아빠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며, 엄마는 여전히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는 세계를 살기로 정했다.
소년이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수많은 갈등과 혼란 속에서 진실을 보지 못해 힘들어 하는 우리 관객들에 대한 은유다. 영화는, 자신에게 들려오는 온갖 구설수와 지리멸렬한 갈등으로 진실을 가려낼 수 없는 흩뿌연 안개 속에서도 쉽사리 좌절하거나 주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과 믿음으로 세상과 진실을 파악 또는 형성해나가는, 인간의 성장 가능성에 관한 희망을 내비친다.
그래서 소년은 무죄를 선고받고 집에 돌아올 엄마와의 재회가 여전히 두려웠다(자신이 선택한 진실이 잘못된 것일까봐, 또는 그 무게감으로 인해). 그러나 그는 이내 엄마를 어른스럽게 위에서 안아주며 자신이 믿는 그 세상을 포용하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