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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knock Feb 12. 2024

<노 베어스> 자파르 파나히, 2023

카메라를 들어올려도 바꿀 수 없는 부조리함, 촬영하는 순간 부서지고 마는 삶이라는 진실, 그럼에도 그 비극을 담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


부조리한 현실을 카메라에 담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파나히는 그 비극을 촬영해야만 한다는 책임감에 카메라를 들어올린다. 자신부터가 출국금지명령을 받은 정치범인데, 국경을 넘어 더 수월하게 영화를 찍자는 스태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현실에 머물러 부대끼지 않는다면 카메라가 찍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게 되므로.

파나히의 카메라는 3편의 현실을 찍는다.

1) 카메라를 들어올려도 바꿀 수 없는 부조리함

파나히는 이란 정부의 감시 하에 있는 정치범으로서 도피를 계속하면서도 이란의 현실을 촬영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을의 금기와 사람들의 경계로 인해 행동에 제약을 받음에도 계속해서 셔터를 누른다. 강박이 있는 것처럼 마을 구석구석을 찍어댄다.

그러나 그는 정작 마을 사람들의 갈등의 원인이 되는, 금기를 깬 남녀의 사랑에 관하여는 증언하지 못한다. 셔터가 눌려야 할 때에 이를 누르지 못하고 무기력한 제3자에 머무를 뿐이다. 촬영으로 변하는 것은 없다.
경찰이 그를 발견하고 곧 잡혀갈 위기의 순간이 왔다. 그에게 방을 내어준 주민이 피할 것을 권하는 까닭에 그는 차를 타고 도망치게 된다. 그러나 총에 맞아 죽고만 남녀를 보고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린다.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그가 도망가지 않고 새로운 현실의 비극을 촬영할 것이 암시된다. 잡혀가더라도, 심지어 죽음까지 무릅쓰면서도 그는 다시 카메라를 들어올린다. 남녀의 죽음, 마을의 억압적인 전통과 정부의 탄압을 촬영하러 나선다.

그의 카메라는 현실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촬영해야만 하겠다는 그 자신의 의지를 담아낸다. 그는 어떤 위험이 닥치건 이를 무릅쓴다. 실제로도 파나히는 <노 베어스>를 찍은 직후 정치범으로 수감되었고, 옥중에서 영화의 수상 소식을 들었다.

2) 촬영하는 순간 부서지고 마는 삶이라는 진실

파나히의 카메라는 어떻게 보면 잔인하고 비윤리적이다. 남녀의 시체를 촬영하겠다는 의지는 부조리에 대한 분노뿐 아니라 기록과 소비 자체에 대한 욕구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파나히는 영화감독으로서 현실의 사람들, 현실의 삶의 모습을 촬영하고자 한다. 실제 연인인 사람들이 유럽으로 이민하려는 시도를 영화로 제작한다. 그는 이란의 국경 마을에 숨어 머무르며 터키의 영화 현장 스태프들에게 영상통화로 지시를 내린다. 인터넷이 연결되는 빈도가 매우 낮아서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지지부진한 진도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에게 두 차례 여권을 건넨다. 처음엔 여자 주인공만 여권을 받아 떠날 수 있었고, 다음엔 남자 주인공도 여권을 받았지만 위조된 것이 너무 명확해서 마찬가지로 여자 주인공만 떠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거짓말에 상처받은 여자 주인공은, 타인의 여권 사진과 같은 외양으로 분장을 한 채로, 영화의 해피엔딩을 위해 허구로 점철된 시나리오 속 배우가 된 자신의 삶에서 진실을 찾을 수 없다며 파나히에게 화를 내고 떠난다.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거짓말로 여자 주인공이 상처받았다며 절망하고 만다.

그런데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고 있다. 누가 어떤 상처를 받았든, 여자 주인공이 어디로 떠나갔든 상관없이. 심지어는 여자 주인공이 변사체로 발견된 현장에서 울부짖는 남자 주인공에게도 향한다. 파나히는 아랑곳하지 않고 "컷!"을 외친다. 비극과 슬픔보다 작품의 제작이 우선시된다.

그렇게, 비극적인 현실에 카메라가 침입한 결과는 허구적 해피엔딩이거나 더 커다란 비극이 되었다.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바꾸려는 의지 없이(혹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메라를 들이미는 행위는 오히려 비극을 만들고 소비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지 두렵게 된다.
파나히는 이 두 번째 현실을 촬영하면서 자신이 머물지 않는 곳의 현실, 또 시나리오가 정해져 있는 허구적 현실의 영화화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뼈저리게 성찰하게 되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극을 촬영해야 한다는 의지

마을에서는 여자아이의 탯줄을 남편이 될 이웃 남자아기의 이름을 대고 자르는 전통이 있다. 그렇게 태생적으로 정해진 짝을 거부한 '현대적인' 사랑은 존중받기는커녕 억압의 대상이다.
그런데 남녀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파나히가 스태프의 제안으로 국경을 넘기를 거부하고 돌아오는 길에, 여자는 파나히를 찾아와 도움을 간청한다. 남자는 파나히의 집에 불쑥 들어와 자신들의 사진이 없다고 말해주기를 부탁한다. 마을 사람들은 끈질기게 그를 찾아와 그 사진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파나히는 곤란한 상황에 놓인다. 현실을 카메라에 담는 자가 필연적으로 견뎌야 할 무게다. 그가 그 사진을 의도적으로든 우연하게든 찍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결국 촌장에게 마을에서 찍은 모든 사진 메모리를 건네고는 그 사진이 없다며 화를 내기에 이른다.

남녀는 도피를 선택한다. 국경을 넘다가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경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그 모습을 본 파나히는 멈출 수밖에 없다. 사회의 억압에 놓인 피해자들의 선혈은, 자신이 발 붙이고 있는 현실 속, 허구적 시나리오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의 조각으로서 그의 카메라가 담아야만 하는 피사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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