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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라 May 01. 2024

나는 어디에서 안전한 관계를 배울 수 있을까

나를 살리는 힘의 비밀

아직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그다지 어린 나이도 아니었던 나는, 가족을 떠나면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타이틀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어쩌면 전부였던 원가족을 떠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배려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날 위한 것을 제대로 요구해 본 적도 없었기에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위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감정도 해소됐다면서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부모님을 떠나 얼마나 잘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묻는다면 맞다. 정말 잘 살 방법을 '1'도 몰라서 엄청난 두려움과 낯섦을 견뎌내야 했다. 익숙한 트라우마에서 힘겹게 벗어나 이제 막 사회생활을 했을 때의 당신도 그랬을 것이다. 사회에서는 나에게 무례했던 원가족을 능가하는 사람들 투성이었다. 제 멋대로 굴기 위해 있는 힘껏 강한 척을 하는 사람, 속 마음을 숨기고 겉으로는 선한 척을 하는 사람, 본래는 선했을 테지만 너무 많은 곳에서 마음이 다쳐 자신을 위해 위악스러워진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심리적 괴로움을 타인을 향해 쏟아낸다. 어디에서도 자신의 마음이 정당했다고 인정받아본 적 없는 불안에 갇힌 사람들과의 만남의 연속이었다.


겨우 나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벗어난 곳이 더 무서운 세상이었기에 승모근에 잔뜩 힘을 주고 모든 순간을 또다시 견뎌내야 했다. 그게 또 다른 번아웃을 불러일으켰던 경험은 아마 자신을 지칭하는 명예로운 호칭 따위와 관련 없이 누구나 겪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빌런들을 이겨내 볼 힘은 어디서 얻었어야 했을까? 그 사람들은 어쩌다 이런 사람들로 전락했나? 하마터면 나 역시 그런 사람들을 따라 할 뻔했을 만큼 강력하고 질긴 사람들이었다. 가족조차 정서적으로 의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는데, 가족도 아닌 누군가가 나를 지지해 줄 거라는 허무맹랑한 말들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렇게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갔다. 엄청난 고립감과 외로움이 들면서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안전한 관계를 맺어볼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슬픈 생각들도 났었다. 끝없이 거듭되는 삶의 좌절 앞에서 혼자 걸어간다는 건 예상보다 더 험난했다.




원가족과 건강한 관계를 경험해 보고 나를 보호할만한 소통법을 배워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억울했던 그 틈에서 알게 모르게 나를 위한 힘도 키워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닥친 문제를 어느 한 사람도 억울하지 않도록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풀리지 않는 일은 없었다는 경험들이 의외로 나를 위한 힘이 되기 시작했다. 언제나 가족들의 힘든 일에 잘 나서 이를 해결하고자 애를 써오면서 언제부턴가 나는 어렵고 난처하게 닥친 갈등 상황을 꽤 그럴듯하게 처리해 내는 사람이 되어있던 것이다. 비록 그 대상을 잃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누군가에게 꽤 괜찮은 지원군으로 헌신할 수 있는 인재였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꽤 섬세하고 견고한 문제해결능력과 회복탄력성을 쌓았는지도 모르겠다.


단, 그 힘을 나를 위해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나를 표현하고 또 변호하는 힘이 너무 부족했었다. 지금까지는 말을 하는 것보다 그저 행동으로 헌신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헌신했던 이유와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고 여기에 내가 바라는 보상이 뭐였는지 표현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했다. 우린 모두 다 속으로만 쌓은 말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었다. 누가 더 잘났었고 그래서 부족했었다는 평가 따위가 아닌, 이렇게 애쓰게 해서 미안했고 앞으로는 이 힘든 마음을 같이 덜어주자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었다. 그저 편안하게 소통할 수 있는 관계가 절실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조차 읽기 어려워하거나 속마음을 말한다는 것에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뿌리 깊은 저항감이 강한 방어기제로 나타나는 이들 앞에서, 깊이 있는 소통은 불편함을 넘어서 무례함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가 감정이 틀렸다고 평가할 같은 두려움에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지 못했고 그게 스스로를 감정에 가두는 결과를 만들었었다. 그저 생각과 의견은 자유롭게 말할 있는 분위기와 상대방을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상대방의 평가와 비난에 얼어붙어 과도한 방어기제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이 상명하복의 사회에 질리도록 고루, 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빌런'들의 훼방 때문이었다.


누구나 다 자신의 삶을 위해 오늘의 성실함을 빛내지만, 빌런들은 자신을 위해 쌓은 것에 누군가가 반드시 인정을 해주고 타인들이 자신을 따라주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긴다. 마치 자신의 영광이 모두의 영광이 된 것처럼 대단하게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데, 그 정도가 타인의 에너지를 착취하는 수준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또 대부분 여기에 쉽게 휩쓸린다. 가족단위의 작은 사회에서부터 너무 당연하게 학습되어 있던 인정과 복종의 문화가 너무 강해져 버린 나머지 개인들의 가치가 지나치게 부질없게 비치고 있는 것이다. 존중을 곧바로 존경으로, 존경을 곧바로 수긍을 너머선 복종으로 나타나길 바라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반대의견을 내보이는 순간 자신을 공격하는 적으로 인지하는 단순한 논리에 휘둘리면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오해하게끔 상황을 몰아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실제로 직접적인 관계당사자가 아닌 제삼자들은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쉽게 여론에, 분위기에 휩쓸려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추측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오히려 당사자의 본래 의도와 갈등의 본질은 흐려지는 정치적 상황으로 망가져 버리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과 생각이 얼마나 괜찮고 충분히 가치로운 것들인지 인정해 줄 '내'가 필요하다. 어떤 관계를 맺기 전에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부터 온화하고 성숙할 필요가 있다. 흥분하며 분위기를 몰아대는 빌런의 과격한 방어기제에도 흔들리지 않을 확고한 중심과 가치를 가진 채 뜻을 계속 펼쳐 나아갈 '내 편인 나'의 지지가 필요하다. 이 가치를 위한 소신 있는 노력이 설사 누군가에게 실패로 비칠지언정 괜찮았다고 말해줄 '어른'이 필요하다. 내가 먼저 나를 살려주고 숨을 편안하게 있게 인정해 본 뒤에야 빌런들을 파악하기 위한 기준을 갖는 눈이 생긴다. 더는 두려운 상황에 꼼짝없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기억하자. 타인은 나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고, 스스로의 상황과 어려움을 잘 아는 이는 나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상대나 분위기가 어떻든 상관없이 자신을 위해 당장 무슨 행동이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를 인정하는 말 한마디로 자신과의 관계부터 평온하고 안정적인 관계로 회복하길 바란다.


다음 글에서는 빌런들을 걸러낼 있는 '사람 보는 눈을 키우는 방법'들다음 글을 통해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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