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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라 May 08. 2024

툭하면 호구였던 저는 '이것'으로 불립니다.

호구에서 벗어나 사람 보는 눈을 키우는 방법

처음엔 괜찮은 관계인 듯 보였다가도 그에게 온전하게 마음을 다하던 순간에 뒤통수를 맞은 경험이 있는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배신과 기만을 경험했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그 타이밍에 내밀어준 손이 고마워 잡았을 뿐인데 알고 보면 더 끔찍한 복종이 필요한 착취자, 다단계나 사이비종교 등의 경우가 그렇다. 그저 안전한 관계를 찾아가고자 했던 나의 노력은 늘 그렇게 기대했던 상대로부터 좌절당했다. 한 번이었으면 다행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비슷한 일은 되풀이되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우리는 툭하면 호구가 되어버렸었다.


상처가 된 관계 속에서 모든 가해자는 타인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스스로를 자책한다. 도대체 그렇게까지 호구가 되어가는 동안 나는 모든 상황을 어떻게 방치했었는지 등에 의문을 갖는 따위로 절망한다. 배운 것이 스스로를 깎아내렸던 가스라이팅뿐이었기에 여전히 내가 가진 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도 인정받아본 적 없는 내 힘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이유는, 그저 다 똑같이 자신들의 힘을 전혀 모른 채 불안 속에서 살고 있어서 그렇다. 그러기에 많이 내몰려 본 사람일수록 타인을 착취하는 방법밖에 배우지 못한 채 그것이 성격으로 굳어진다. 대표적인 소시오패스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가 호구라고 느껴질 때, 부디 더 이상 스스로를 책망하는 일 따위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먼저 호구라는 호칭부터 '선의의 피해자'로 전환시킨 후, 실패했던 그 관계에서 원래 추구했던 욕구가 무엇인지부터 되새겨야 한다. 나를 감히 고작 호구로 치부하고 뒤통수를 친 그 이는 반사회적 승리를 경험했기에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두 번 다시 만들지 못할 신뢰 관계의 가치였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전파가 가능했던 선한 영향력으로 여기까지 왔고 그 상대를 선택하는 것에만 조금 안타까운 실패했던 것뿐이다. K장남과 K장녀 (또는 각 가정마다 헌신했던 선의의 피해자) 모두 이 신뢰를 가까운 가족이기에 아무 의심 없이 선택했던 것일 뿐, 그 힘의 가치가 무너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잊지 않았다면 처음 우리가 선택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속으로 그렸던 그림이 있었을 것이다. 이 관계를 돈독하고 아름답게 쌓아서 이 사회를 살아가는 힘겨운 과정마다 좋은 에너지를 함께 발산하고 싶었던 계획들이 그렇다. 세상은 어차피 혼자서는 못 산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런 선한 의도로 내가 괜찮다고 믿고 싶은 그 누군가와 함께 나은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였다. 우리는 호구가 되어왔던 게 아니라 내가 먼저 호의를 베풀었을 때 오고 가는 개개인의 가치가 시너지를 얻어 큰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선택은 우리가 했기에 상대방을 잘못 골랐다면 지금은 좀 더 차분하고 냉정하게 상대를 고를 여유가 필요한 것이지 좌절이나 절망에 스스로를 밀어 넣을 필요가 없다.


물론 아무래도 감정이 있고 기대했던 것이 좌절됐을 때의 아픔이 있기에 배신을 당하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음을 바로 도모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친 마음의 자신을 이제는 그저 충분히 위로해 줘야만 그다음스텝을 밟을 수 있다는 건 이미 알지만 자꾸 빨리 지나치려고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이 전 글들에 언급했듯이 필자는 20년을 아파하고 방황하며 때로는 실패한 선택에 집착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돌이켜보니 실패에 집착하고 미련을 남길수록 같은 좌절을 겪는 시기만 길어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가 더 이상 그 선택을 반복해 스스로의 새로운 기회를 잃지 말라고 말해줬다면 조금 더 일찍 깨우치고 금방 털고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면 누군가가 말해줬어도 내 선택이 옳다는 아집에 그것을 흘려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아마 내가 가진 힘의 진짜 가치를 알았더라면 좀 더 새로운 도전을 이렇게까지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나 오래 충분히 아파할수록 얻는 가치도 역시 있다. 반드시 이런 과정의 경험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고유의 힘들이 그만큼 단단해지고 견고해진다는 것이다.


누구나 상호 간 건강하게 의지하는 사회적 관계를 갈구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의지와 의존의 경계였다. 위에 언급했듯이 우리를 호구로 만들었던 가해자는 '타인'이라고 했지만, 그 반면에는 바로 상대방에게 내 가치를 제대로 알리지 못했기에 내가 그들의 착취를 허용하는 셈이었다. 그들의 강단 있는 모습들에 나의 진정성을 내어줬을 때 이 진정성에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 분명히 알려줬어야 했다. 내 에너지는 고유의 지향하는 가치가 있고, 나는 당신과의 상호 신뢰 관계임을 믿기에 좋은 시너지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이다. 물론 진짜 사기꾼들은 이런 말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알겠다고 하며 착취를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도 말의 힘은 꽤 강하기에 어설프게 당신을 착취하려는 마음을 먹은 이는 자신의 숨겨진 의도를 들킨 것 같은 마음에 내심 긴장을 하게 된다. 이 정도만이라도 당신의 가치를 잃지 않게 상호 간에 상기시킨다면 어설픈 배신이나 기만 앞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방지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어차피 마음먹고 접근하는 사기꾼을 미리 걸러낼 방법은 없다. 그러기에 나의 가치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사소하게 피해를 보는 일은 사라진다.


지금도 많은 심리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당신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채고 착취당하는 포지션에서 벗어나라고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필자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사건을 겪은 경우가 아니어서 상호 간의 관계가 가까울 때는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이 정도의 헌신은 가뿐하게 나오는 자력을 가지고 있기에 상대방의 선 넘는 착취와 무례함을 허용하고 있다는 의미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부를 했고 훈련을 하고있다 한들, 필자 또한 여전히 피곤하게 느껴질 만큼 넘치게 배려하는 일이 많다. 스스로를 매 순간 잘 지켜낼 수는 없고, 훈련이 모두 완벽하지도 못하다. 다만 중간중간 불편함이 올라올 때 이것을 인지하게 되고 스스로 위로하기 어려운 불편함에 대해서는 표현하고 어필하는 것을 함께 고민하게 되다 보니 억울함이나 좌절감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를 선택하는 것에 여유가 생길 수 있었다.


상대를 보는 눈은 결국 나의 힘을 알아채는 가치에서 나온다. 나와 나의 가치를 보호할 수 있어야 사회에서도 그 중심과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다음 글에서는 그 힘을 이용해 나의 주변 곳곳에 숨어있는 질 나쁜 이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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