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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라 Sep 14. 2023

안녕 나의 가해자 1

#안녕? 나의 가해자




극단적으로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에도 상당한 에너지가 들어간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집단화가 될수록 증대된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싫어한다는 것은 그만큼 가진 에너지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움의 대상이 존재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그 에너지를 충분히 그 대상을 미워하는 데에 쓴 뒤에 다시 자신을 위한 에너지로 변환시킨 뒤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부터 내가 그토록 오랜 기간 쌓아오던 미움과 증오를 과도한 감정소모 없이 오로지 나에게 이로운 에너지로 전환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이제야 이 무거운 이야기를 이렇듯 평화롭게 할 수 있게 된 것이 기쁘다.






나 역시 누군가가 미웠다. 그 대상은 평생에 걸쳐 괴로운 관계를 맺어온 가족도 있었고 원치 않게 만났던 학교의 빌런이기도, 또는 회사에서 만났던 갑질러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나는 위축되고 얼어붙었으며 이 기간이 길어지면서 경직되어 있는 게 나의 제로베이스 감정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나의 피해의식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나’라는 개인을 포함시키는 모든 혐오에 반항감과 저항심이 들끓었었다. 이 분노에 휩싸인 채 스스로를 잡아먹힐 것 같아 두려웠고, 내가 살고자 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분출시키고자 키보드 워리어가 되기도, 감정적인 언행으로 분란을 만들어내는 프로불편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문제제기는 늘 더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게 됐고 스스로를 더 고독하게끔 고립시키는 방법일 뿐이었다.



그저 내가 가진 상처를 이해받고 위로받고 지지받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이걸 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차라리 내가 사라져야만 괜찮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쓸모없고 하찮아진 기분의 연속에 나는 살고자 하는 외침도 부질없어졌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게 남아있는 건 아직 아무런 힘없는 지난날의 나를 닮은 나의 아이들과, 극도로 치달은 나의 우울함을 감당하기 버거워하는 남편밖에 없었다. 이들 역시 이제는 나를 불편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음을 느꼈다. 차라리 나보다 더 좋은 아내와 엄마를 만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해두고 싶었다. 아이들만큼은 나처럼 불행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아이를 위한 최소한과 최선의 노력은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난생처음 나는 아니지만 내 아이를 위한 상담이 시작됐었다.



애석하게도 첫 상담은 좋지 못했다. 상담사는 내가 늘 접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역시나 공감보다 자신만의 기준에서 나를 판단하며 비판적 시각을 가진 것이 보였다. 그런 언행으로는 나의 피해의식을 다잡거나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시선과 조언을 받아낼 힘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어렵게 찾은 상담센터를 깔끔하게 포기하면서 다시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나도 다른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부터 나고 내 상처가 겹쳐지며 공감이 되는데 그것도 안 되면서 누구를 상담해 주고 치유해 준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에게 낸 상담비용이 너무나 아까워졌다. 세상은 이렇게나 냉혹했고 심리를 다룬다는 전문가조차 나에게 살갑지 못하다면 도대체 나와 같은 바닥까지 무너져버린 사람들은 무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 비난과 혐오만 반복되는 사회에서 무슨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까지도 나는 희망 한 점이라도 찾아 살아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나의 마음을 알아줄 내 편이 하나도 없다는 게 기이하고 이상했다. 나의 부모님은 애초에 나를 낳지 않는 편이 좋았을 정도로 불행하고 가여운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조차 하루를 평화롭게 살아가기 어려운 와중에 아이를 둘이나 낳았으니 어느 한쪽은 결국 희생자로 만들어 당신들을 위한 삶을 살게끔 해야 그나마 숨통이라도 트고 지냈을 것이다. 거기에 적합한 아이는 워낙 예민해서 매사 뭐 하나 해내기 힘들어하는 겁 많고 소심한 아이, 바로 내가 적절했겠다. 그리고 좀 덜 민감해서 불합리한 사회에도 잘 적응할법한 또 다른 아이쯤은 어떻게든 성공시켜 보란 듯이 키워내 양육의 성취감 또한 느끼고 싶었을 테다. 그게 물질과 마음이 모두 바닥인 부모에게 가장 쉬운 육아법이었을 뿐이니 모든 걸 그 둘의 탓으로 돌리기엔 다소 무리도 있었다. 그들 역시 어린 시절부터 순탄치 못했던 성장과정과, 두려움과 공포심이 지배하던 시대적 배경은 어쩔 도리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은 이렇게 자신의 삶에서 힘들었던 것을 자신보다 약자인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을 ‘나르시시스트’라고 정의한다는 것이었다. 이 지독한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폐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에 언급했던 학교에서 만났던 빌런이나 회사 같은 사회에서 존재하는 갑질러, 그리고 가장 우려스럽게도 가정 내에서도 화목과 평화를 갉아먹는 권위를 강요하는 이들이다. 자신들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손쉽게 타인에게 전가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사람들과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열등감을 생산해 내는 곳이었고 당장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고 타인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기 위해서는 가장 옳은 방법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 목표를 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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