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철호의 #길] 우산봉-신선봉-갑하산
퇴근길, 대전 둔산에서 유성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벌겋게 물든 3개 봉우리가 손짓한다. 왼쪽부터 갑하산(469m), 신선봉(565m), 우산봉(574m)이다. 수고했어 오늘도, 토닥이면서 놀러오시라, 유혹한다. 저 봉우리 너머 노을을 보고 싶었다. 능선에 서서 바라보는 석양빛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머릿속은 이미 몽환적인 빛으로 채색된 사진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일기예보는 줄곧 흐림, 또는 가끔 비다. 머릿속 노을빛을 지워가면서 출발지로 향한다. 오늘 여정은 유성구 반석동에서 우산봉으로 올라 신선봉·갑하산 찍고 갑동으로 내려오는 8㎞ 남짓 되는 구간이다. 대전둘레산길 8구간의 하이라이트이며 세종~유성 누리길 2구간이기도 하다. '계룡산 전망대'로 불리는 곳이다. 그렇다. 계룡산 전망대라 해서 계룡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계룡산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불린다.
반석역과 멀지 않은 등산로 들머리. 이정표가 서 있다. ←우산봉 3.2㎞. 산길에 들어서면 곧 군사보호구역 철책을 만난다. 이 철책은 초입 상당 거리를 함께한다. 군데군데 철책 안의 경비초소도 보이고 움직이는 감시카메라도 작동 중이다. 매미소리 가득한 오솔길, 소리가 땀을 식히는 느낌이 든다. 조금 습하지만 생각보다 덥지는 않다. 15분쯤 걸었을 때 언덕 위 정자가 기다리고 있다. 옆으로 살짝 트인 곳으로 빼꼼히 내다본다. 대전 도심이 눈에 들어온다. 대전~당진고속도로가 보이고, 대전신세계 높은 건물 아트&사이언도 보인다. 조금 더 가면 구암사 가는 첫번째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정표는 우산봉 2.3㎞→를 가리킨다. 그 옆에 우산봉 전설 세시랑 이야기가 적혀있다. 우산봉에서 정성껏 기도하면 훌륭한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이곳에 많은 여인이 찾아온다고.
흔적골산 닿기 전 조망이 조금 가능한 곳이 나오는데, 반석동이 구체적으로 줌인되고 그 뒤 대전 도심이 살짝 맛만 보여준다. 구암사 가는 두번째 갈림길이 지나고 나면 우산봉을 향한 본격적인 업힐이 시작된다. 이정표는 ←1.9㎞ 반석마을7단지, 우산봉 1.4㎞→ 남았다고 알려준다. 이 구간은 수묵화 같은 소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큰 나무들보다 가늘고 구불구불한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우산봉 턱밑쯤 왔을 때 조망터가 연속으로 이어진다. 세종 초입과 대전 도심이 파노라마로 잡힌다. 왼쪽은 흔적골산 너머 세종이 멀리 와닿아 있고 오른쪽은 앞으로 가야할 신선봉, 갑하산 봉우리와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갑하산 뒤로 수통골 도덕봉과 금수봉, 빈계산 줄기가 남으로 쭉 이어져 구봉산에 닿아있다. 대전둘레산길 8, 9, 10구간과 11구간을 멀리서 짚어본다. 그 뒤로 희미하게 대둔산과 서대산도 보인다. 바로 눈 앞으로 포커스를 가져오면 오늘 구간을 끝까지 함께할 국립대전현충원이 위용을 드러낸다.
우산봉에 오르면 계룡대 전망대 능선이 시작된다. 장쾌한 계룡산 줄기가 시선을 압도한다. 동학사지구 초입 장군봉이 눈에 들어오고 그 줄기가 삼불봉, 관음봉, 천황봉까지 이르는 스카이라인이 압권이다. 쌀개봉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친 능선을 쭉 훑어 내려오면 황적봉, 도덕봉을 지나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이 산줄기가 갑하산, 신선봉, 우산봉으로 이어진다.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걷는다. 신선봉으로 향하다 보면 봉우리를 가운데 두고 왼쪽 대전 도심과 오른쪽 계룡산 줄기가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베봉으로 가는 갈림길과 우산봉의 중간 무렵,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 바위틈에 샘이 있다.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데 갑동마을에 사는 갑동이라는 아이가 꿈에 나타난 노승의 이야기대로 병든 어머니에게 이 샘물을 100일간 떠다 드렸더니 어머니 병이 나았다는 '갑동이와 효자샘물' 이야기다. 이 바위는 볼 때마다 웅장한 크기에 감탄하게 된다.
얕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몇 번 반복하면 어느새 신선봉이다. 평평한 신선바위가 고인돌처럼 놓여있다. 계룡산 동학사지구가 더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오고 눈을 돌리면 수통골과 저 멀리 도안, 관저 아파트단지까지 조망된다. 신선바위에서 한참 머문다. 챙겨온 간식도 먹고 커피광고처럼 김 모락모락 나는 커피도 마셔본다. 바로 눈앞의 계룡산 장군봉 쪽을 바라보며 '오늘 멋진 석양을 보는 것은 역시 어렵군.' 생각을 한다. 살짝살짝 해가 얼굴을 비추긴 하지만 구름이 도무지 걷히지 않는다. 오히려 내릴지 모르는 비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신선봉을 지나면 거북바위 전설과 요괴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거북바위는 말 그대로 거북이를 닮아서인데 ‘계룡산에 오르면 승천할 수 있는 거북이 한 마리가 계룡산에 오르기 위해 갑하산을 넘다가 계룡산 절경에 반해 이곳에서 남아 갑하산을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거북바위에서 조금 더 가면 요괴 소나무를 만난다. ‘영험한 기운을 품은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의 기운을 탐내던 요괴가 그 기운을 취하려 하자 신선봉에 있던 신선이 이 요괴를 이곳에 가뒀다’는 이야기다. 요괴나무는 정말 기이하게 생겼고, 거북바위는... 잘 모르겠다.
멀리서 봐왔던 갑하산 아래 능선이 점점 가까이 온다. 갑하산 턱밑 오르막이 시작되기 전 로프가 있는 능선 구간이 있다. 오른쪽엔 동학사지구가, 왼쪽엔 현충원과 대전도심이 열려있고 뒤에선 신선봉이 손 흔들며 인사한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이 능선에 서면 누구나 "하~" 감탄사를 내뱉는다. 애초 석양을 보려고 한 곳이 이 곳이다.
갑하산 정상에 오른다. 정자도 있다. 그러나 이 곳은 조망이 없다. 숲으로 꽁꽁 감춰서 주변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갑하산 정상을 찍으면 내려갈 일만 남는다. 하산길이 두 군데로 나뉜다. ←갑동 1.05㎞ / 삽재고개 1.49㎞→ 이정표가 있다. 삽재 쪽 뒤편으로 하산길을 택한다. 이 과정에서도 '계룡산 전망대'는 계속된다.
더 가까워진 계룡산 줄기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온다. 이 하산길은 또다시 선택을 요구한다. 대전둘레산길 8구간 공식경로대로 직진해서 삽재로 가는 길과 왼쪽으로 틀어 갑동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107번 시내버스 타기 좀 더 쉬운 갑동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이 하산길, 내려가는 길이라고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자갈길이 꽤 길다. 경사도 꽤 심해서 방심하다간 미끄러져 엉덩방아 찧기 십상이다. 버스시간 맞추려고 서둘러 내려가다가 몇 번 위기를 맞는다. 예상도 못 했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내려갈 때 더 조심하고 집중하란 얘기를 되새긴다. 산행도 그렇지만 우리 삶도 그럴 것이다. 오버페이스 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주제파악 해야 하고 제 분수를 알아야 한다. 산에서 내려오니, 갑동 여기저기 켜진 불빛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