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산업 민영화, 그 뒷 이야기 8

브라질 가는 밤 비행기의 이야기

by 요아킴

캘리포니아 일정을 마치고 브라질로의 이동은 한 밤중에 이루어졌다. 샌프란시스토에서 브라지까지 직항이 없어졌기에 일단 마이애미를 거쳐서 한 번 비행기를 갈아타는 일정이었다. 총 이동 시간은 마이애미 공항 대기 시간까지 합쳐서 11시간. 샌프란시스코에서 밤에 출말, 상파울루에는 다음날 오전에 도착하는 그런 피곤한 일정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어둠을 뚫고 유나이트항공 보잉 737 비행기가 힘차게 이륙했다. 사실 비행기 이륙 전에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공동연구단 일행의 모든 일정은 비즈니스 좌석을 이용하도록 돼 있었다. 단, 최용석과 한전 실무 차장 한 명 등 두 명만 이코노미 클래스를 타게 됐고. 그러데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이애미로 가는 비행기는 아예 비즈니스석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항공권을 예매한 여행사는 이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이코노미석으로 다 된 거야?”


성질 급하기로 유명한 한전 구조조정실 정하황 부장인 티켓팅 과정에서 연구단 위원들의 비행기 좌석이 이코노미석으로 된 것에 대해 펄펄 뛰며 현지 가이드에게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가이드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예약이 돼 있네요. 사실 이 비행 편은 이코노미 좌석밖에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 연락해 볼까요?”

라고 했다.


“뭐? 비즈니스석이 없는 비행편이라고? 뭐 이따위로 예약을 했지? 지금이라도 바꿀 방법은 없는 건가?”


“예... 서울로 전화해 보겠지만... 이게 오늘 밤 마지막 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이애미에서 상 파울로로 가는 연결편도 있고 해서... 항공권 변경이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정하수 부장의 호통에 가이드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서울로 전화했다. 당시 서울 시각은 오전 6시경이라서 여행사 전화는 아무도 답을 하지 않았다. 난처했다.


정 부장은 달리 방법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공항 벤치에 앉아 쉬고 있던 이근석 단장에게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깐깐한 이근석 단장은 의외로 이 문제에 대해 별말이 없었다. 단장이 그렇게 반응하자 나머지 일행들 역시 뭐라 딱히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비행기에 올라 좌석을 찾던 최용석은 깜짝 놀랐다. 보잉 737 기종은 가운데 통로를 두고 양쪽으로 자리가 세 개씩 배치되는 게 일반적인데, 최용석의 좌석이 있는 열의 창가 자리에 이근석 단장이 떡하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며칠 안 된 일정이었지만 최용석은 될 수 있으면 이 단장을 피해 다녔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불만을 품은 분이기에 최대한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4시간이 넘게 밤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바로 옆자리가 그분이라니. 호랑이와 같은 우리에 들어가는 사슴의 기분이 이럴까. 다행스럽게 최용석의 자리는 통로 쪽. 두 사람은 가운데 자리를 완충지대로 두게 된 것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는 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이 단장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최용석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빨리 잠이 드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밤 비행이 이렇게 다행스럽다니.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힘차게 동쪽을 향해 날아갔다. 안정된 고도에 오르자 좌석벨트 싸인도 꺼지고 곧 실내등도 최소한만 켜지는 수면 모드로 비행기 실내가 바뀌었다. 사실 최용석은 오늘 밤을 꼬박 새우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자동차이든, 기차든, 비행기든, 탈것을 타면 잠을 못 자기 때문에 그랬다. 특히 오늘 같은 가시방석에서는 잠이라도 들어야 하는데 어쩌지 하는 고민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문득 노트북이 생각났다. 그리고 서울을 떠날 때 가지고 온 영화 DVD도 떠올랐다. 최근에 재밌게 보고 있던 영화, 이영애 주연의 봄날은 간다가 노트북과 함께 기내 가방에 들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오버헤드 빈을 열고 가방을 내려 노트북을 꺼냈다. 전원을 켜고 DVD를 넣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물론 이어폰은 양쪽 귀에 꼈다.


조금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이근석 교수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무슨 영화를 보고 있나?”


깜짝 놀라서 이어폰을 빼고 당황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예. 봄날은 간다를 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번 보기는 했는데 제대로 못 본 것 같아서 다시 보려고요.”


“아, 그 영화? 같은 제목의 노래가 있지. 백설희라고. 옛날 가수. 아마 전영록 어머니일걸?”


최용석도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를 들어본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뇌리에 박힌 노래는 오히려 자우림의 김윤아가 더 떠오르기는 했지만.


“예. 이영애하고 유지태가 나오고요. 교수님도 보셨네요? 저는 한 번 보기는 했는데 집중을 못해서 다시 보려 합니다. 꽤 괜찮은 영화 같습니다.”


이 단장의 갑작스러운 대화 시도에 잠시 놀랐지만 뭐 까짓것 하는 마음으로 최용석은 대화를 이어나갈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제가 잘 이해 못 해서 그런지…. 마지막에 두 주인공이 헤어지잖습니까? 아마 이영애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가 마음이 바뀌기는 하지만 상처를 입은 유지태가 그냥 이영애를 떠나버리는 것으로 보인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질문하고도 최용석은 속으로 좀 웃겼다. 일반적인 러브라인에서 흔히 벌어지는 뻔한 결말인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근석 교수에게 묻는단 말인가. 이혼을 경험한 연상의 여인과 총각의 러브스토리는 대부분 이별로 끝나는데 말이다.


“뭐, 별거 있겠어? 이영애 처지에서는 연하남 총각과의 관계가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고민했겠지. 사랑한다고 다 이뤄지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 둘이 진짜 사랑한 건 맞겠지만.”


“아, 그렇지요. 둘 사이가 평범한 처녀, 총각 관계가 아니어서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뭔가 가르침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최용석은 답했다. 뭐 별 주제도 아닌데 말이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다른 영화 몇 편이 화제에 올랐다가 역사 이야기, 사회 문제 이야기, 그리고 정치 이야기……. 화제는 계속 이어지고 놀랍게도 두 사람은 마이애미까지의 비행시간 동안 거의 끊어짐 없이 대화했다.


조금씩 창밖이 밝아지고 있었다. 최용석은 문득 손목시계를 봤다. 새벽 두 시 반을 넘고 있었다. 이게 태평양 시간대에 맞춰진 시간이니 도착지 마이애미의 동부 시간으로는 6시 반이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착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잖아? 그럼 네 시간 가까이 밤새 이근석 교수와 대화를 했다고?


마이애미 공항에서 일행은 브라질로 가는 연결 편을 타기 위해 공항 통로를 부지런히 이동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꽤 복잡한 마이애미 공항의 터미널의 인파를 헤치고 도착한 곳은 브라질 최대의 민영 항공사로 성장하고 있던 탕 항공사 카운터였다. 1961년에 설립된 상대적으로 역사가 길지 않은 항공사였지만, 브라질은 물론 남미 전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였다. 이후 칠레, 파라과이의 여러 항공사와 합병으로 남미 최대의 항공사가 됐다고 한다.

브라질항공.jpg


마이애미를 오전 일찍 떠나는 탕 항공의 747 비행기는 산뜻한 하얀색 기체에 어울리게 내부 역시 매우 깔끔했다. 연구단은 비즈니스석으로 향했고 최용석과 다른 한전 차장은 이코노미석에 자리를 잡았다. 마이애미 공항을 오전 10시에 이륙한 상파울루행 비행기는 맑은 카리브해를 넘어 브라질로 향했다. 갑자기 발밑에 나타난 거대한 섬을 보고 그것이 쿠바라는 것을 깨달은 최용석은 한때 동경하던 체 게바라, 카스트로, 피그만 등등의 이름을 떠올리며 스르르 잠에 빠졌다. 상쾌한 비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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